4장 기억의 바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by 리앤

밥상머리에 마주앉은 아버지는 잠시 예전의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난 듯했다. 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 몰랐기에, 나는 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일상이 된 날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세상과 화해하는 치매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사했다. 아이들을 보면 꼭 손을 흔들며 웃었다.


처음에는 그저 나이가 들어 깜빡하는 정도라 여겼다. 함께 밥을 먹고도 나에게 "밥은 챙겨 먹었니?" 물었다. "같이 먹었잖아요." 하면, "아, 그렇지." 하며 웃었다. 그땐 웃으며 넘겼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서서히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기억의 문을 닫아가고 있다는 예감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밤인데 어디가?"


이런 질문들이 잦아졌다.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씩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밀검사를 받아보셔야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시간의 결이 조금 느려진 듯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단정했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 건강해. 무슨 검사를 한다고 그래." 그 말은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오늘 날짜가 몇 월 며칠이에요?"

"지금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이 단어 세 개를 외워볼거예요. 나무, 하늘, 집"


간호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내 귀에는 멀게 들렸다. 아버지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외우는 부분에서 조금 달랐다.


"바람, 별, 물"


순간 내 심장이 쫄아드는 듯했다. 기억이란 이렇게 미묘하게 흩어지며 사라지는 것이구나, 그날 처음으로 실감했다.


CT실의 커다란 기계 안으로 들어갈 때, 아버지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기계음이 반복되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검사실 문이 열리자 아버지는 작게 중얼거렸다.


"전쟁 때 들리던 발전기 소리 같다."


의사는 '노인성 인지저하'가 의심된다고 했다. 약을 먹으면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치매였다. 아버지는 약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며 웃었다. "이건 내 머리 약이래." 그 웃음이 오래 남았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약이 치매를 늦춘다는 말은 현실에서 그리 오래 유효하지 않았다. 병은 생각보다 빠르게 깊어졌다. 어느 날은 나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물었다.

"누구신데 이렇게 도와주시나요. 송구합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착한 치매'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아버지는 전보다 더 온화해지고, 더 친절해졌다. 평생을 버티며 살아온 흔적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대신 자주 울고, 자주 웃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닿는 듯했다.


그해 봄, 뉴스에서는 연일 천안함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원인 불명의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앵커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화면 아래 자막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폭발 원인 미상, 46명 실종'


아버지는 물 한모금 마저 마시다 말고 들던 손을 멈췄다.

“...또 터졌나?”

그는 숟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눈빛은 텔레비전이 아닌, 오래전 바다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밤에 바다가 번쩍하더니, 다음 날엔 다들 사라졌어. 그때도 북에서 쏜 거였지... 사람 목숨이 참 허망해."

그의 목소리는 멀고 희미했다. 마치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나는 밥그릇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머릿속에서는 1950년과 2010년이 겹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경계에 앉아 있었다.


"밥, 잘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인사는 나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오래전 함께하던 누군가에게 보내는 인사일까. 문득 나는 아버지의 친절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착한 치매' 속 친절은 단순한 병의 증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도 사람을 살리고, 서로를 지켜냈던 기억의 잔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기억은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 여전히 새겨져 있었다.


나는 화장실만 다녀와도 아버지가 물었다.

"밥은 먹었는가?"

그 말 속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다정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후 아버지와 산책을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꾸 인사를 해서 곤욕을 치렀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또박또박 인사했다. 지나가던 사람도 얼결에 "아, 네,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 뒤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 인사들은 마치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햇살이 벤치에 내려앉으면 아버지는 손바닥을 펼쳐 빛을 감쌌다. 대신 내가 손을 뻗어 가려주면 또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뭇가지가 사람 머리 높이로 내려와 있어도 그걸 보고 인사했고, 멀리 새가 날아가면 "잘 가세요." 했다.


그의 인사는 어느새 하나의 의식 같았다. 마치 세상 모든 존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인사처럼. 그렇게 아버지는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도 세상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곁에서, 인사가 곧 살아 있다는 증거임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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