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문 앞에서

오래된 시간과 마주하다

by 리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도착을 알렸다. 미들버리 대학교 교정에서 켄싱턴으로 오기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60년 기다린 인생에 비하면 이것쯤은 사실 너무 쉬웠다.


켄싱턴의 오후는 고요했다. 도착 안내음이 울렸지만, 나는 한동안 차문을 열지 못했다. 집은 빨간 벽돌에 난간이 설치된 오래된 집이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늙은 나무 한 그루가 방 창문쪽을 가리고 있었다. 포치 앞에는 바람개비가 두어개 꽂아져 간간이 바람따라 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국 영화 속에서 자주 본, 낡은 싱글 하우스였다.


안전벨트를 풀고 심호흡을 했다. 운전석 앞거울로 머리를 단정히 쓰다듬었다. 흰머리카락이 몇 개 나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고쳐 묶고, 아침에 했던 화장을 다시 확인했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면서 서둘러 그렸던 얼굴이었다. 눈썹을 그리고 아이섀도도 했다. 입술이 메말라보여 다시 립밤도 챙겨 발랐다. 조금 전보다 훨씬 생기가 있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나의 초조함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풀었다.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침 삼키는 소리도 나에게 크게 들려왔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싸늘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가볍게 작은 가방만 챙겼다. 집 드라이브웨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현관문 앞까지 갔을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겨우 큰 숨을 몇 번 내쉬며 벨을 누를까 하다가 (사실 벨은 찾지 못했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나도 한동안 침묵했다. 다시 두 번 두드릴때야 집 안에서 인기척이 낫다. 슬리퍼를 끌고 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무바닥에서 나는 끼이익 소리도 들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거기엔 푸른 눈을 가진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키가 컸다. 뒤이어 노인의 아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들은 경계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이제 내가 말을 할 차례였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누구를 찾고 있는지. 잠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만 달짝거렸다. 아까 바른 립밤의 촉감만 느껴졌다. 노인의 아내가 다가와 문을 더 열었고, 그렇게 노부부는 내 앞에 서있었다.


"혹시 한국전쟁에 참여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윤영수의 딸입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또박또박 영어로 말했다.

그들은 놀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키가 큰 노인이 검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 사이 나도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엉클 짐을 찾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이 집에 사셨다고 들었어요." 잠시 노인의 손이 멈추었다.

"Are you..." 그의 목소리는 기억을 더듬듯 떨렸다.

"저는.. 저는 하우스보이였던 윤영수의 딸 윤지안입니다."

그는 먼 과거를 더듬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이 더해진 후에야 입을 달짝거리며 크게 "영수! 영수!"하고 외쳤다.

노인의 눈이 추억에 어린 걸 보고 '찾았다'고 직감했다. 그는 짐이었다. 50년 전 주소에 짐이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도 함께!


긴장된 짐의 근육이 얼굴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처음과는 다르게 말랑해진 얼굴이 꼭 마시멜로 같다는 생각을 할때쯤, 노인의 아내가 활짝 웃으며 "Come in, please." 라며 문을 더 활짝 열었다. 짐이 문에서 잠시 비켜섰다. 집 안으로 한 발 들이자, 알싸한 계피향이 퍼졌다. 늦가을의 끝자락이 내 코끝에 스며드는 듯했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렸더니 짐이 아내에게 뭐라고 낮게 말했다. 아내는 집 안에서 신었던 것 같은 슬리퍼 하나를 들고와 내 앞에 놔주었다. 아, 하는 짧은 신음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짐은 내가 슬리퍼를 신을 때까지 문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었다. 소년이었던 아버지를 연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소년을 지키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잠시 어색함이 돌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밝게 웃어보였다.


그는 나를 집 안쪽 다이닝룸으로 안내했다. 그 한 발 한 발을 마루에 디딜때마다 아버지의 십년 치 삶이 그곳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딸로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닌 어떤 무게감도 같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로 복잡했고, 눈은 짐의 집을 살피듯이 훑었다. 역시나 오래되고 낡은 목재 냄새가 계피향이 다 가리지는 못했다. 벽난로 위에는 전쟁 당시 찍었던 흑백 사진과 손주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나무 액자에 담겨져 있었다. 어느 걸음에서는 삐이익 나무소리도 났는데,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안내한 곳엔 둥그런 나무 식탁이 있었다. 조명이 적당히 노랗고 조도는 낮았다.


짐의 아내는 나에게 물을 한 컵 따라주었다. 안그래도 입이 바짝 마르던 참이었다. 따뜻하게 끓인 'Cinnamon Apple Cider' 라며 계피사과차가 담긴 머그잔도 내밀었다. 아까 집 안으로 들어올 때 맡았던 그 냄새였다. 한 모금 마시니, 계피향이 늦가을 그러니까 초겨울답게 은근했다. 게다가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온기는 오래 닫혀 있던 시간의 문을 천천히 여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짐은 나와 같은 식탁에 앉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Ji Ahn" 그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발음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동안 멈춰 있던 내 머릿속 시계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틱, 톡, 틱, 톡 아주 작고 분명한 소리로. 아버지의 세월이 내 발끝까지 흘러들어오는 듯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도착했음을 알았다.


짐의 아내는 그에게도 김이 모락모락나는 머그잔을 건넸다. 그 사이 길다란 콘솔 위 사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젊었을 때 군인이었던 짐과 아시안 소년이 거기서 함께 웃고 있었다. 그 아시안 소년은 나의 아버지였다. 그때 짐이 목을 축이며 말했다.


"Let's talk about your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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