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먼저 도착한 따뜻함
나는 짐을 눈앞에 두고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에 대해 어디서부터 얼마나 말해야 할까. 지금은 남은 기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 중에서도 짐, 당신만큼은 여전히 붙잡고 산다고 해야 할까.
그때 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수는 잘 있나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묻는 눈빛이었다.
"네, 잘 있어요. 늘 짐 이야기를 했어요. 아니 계속 하고 있어요. 제가 주소를 가지고 있었고, 한번쯤은 꼭 오고 싶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 길을 오셨네요."
그 한마디가 가볍게 들리지는 않았다. 육십 년의 세월을 건너 이제야 마주 앉은 자리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한대로, 영수는 나의 하우스보이였어요. 나보다 늘 먼저 일어나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척척 해냈죠. 그 작은 손이..."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힘들게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옆에 있던 짐의 아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엄마도 늘 아버지에게 그랬다. "기침이 사납네!" 하면서도, 말끝에는 다정한 손길이 있었다.
짐은 곧 안정을 찾고, 아버지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래를 잘 불렀다고 했다. 그래서 미군들 사이에서 박수도 받고 온갖 캔디를 받기도 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쑥스러움이 많고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전쟁 중에 노래를 부르며 웃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짐이 갑자기 "진짜!"라며 한국말을 내뱉었다. 그 자신도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 시절 몸으로 배운 한국말이 몇 개 더 남아 있다고 했다. "갠차나" 그가 멋쩍게 발음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괜찮아.'
아버지는 늘 그말을 했다. 어릴 적 실수가 많은 내가 물심부름을 하다가 엎질러도, 자전거를 처음 타다 무릎이 다 까져서 와도. 아버지의 그 '괜찮아'는 나에게 위로이자,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그 단어를 짐의 입에서 들으니 코끝이 찡했다.
잠시 후, 짐이 물었다. "영수,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 건강한가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작게 말했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세요. 치매와 싸우고 있어요. 엄마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전쟁의 기억 속에서 살고 계세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엌쪽에서 나던 인기척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짐이 말했다.
"영수와 나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네요. 그땐 그저 조그만 아이로만 봤는데."
부엌에서 나오던 짐의 아내가 말을 이었다. "우린 다 같이 늙어가잖수. 영수도 마찮가지겠지."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윤영수 군의 딸인 나도 벌써 마흔넷이니까. 전쟁 당시 짐의 나이보다 두배는 더 먹은 셈이다. 세월은 그렇게 서로를 보지 않는 사이에도 많이 흘렀다.
식탁 위에는 어느새 음식이 가득 차올랐다. 짐의 아내, 마따는 분주히 접시를 놓고 있었다.
"마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지안! 너 내 이름을 알고 있었네." 마따와 나는 동시에 짐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짐이 아내 마따에게 보내는 편지를 몇 번 봤거든요. 러브레터!" 러브레터에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웃으며 아직도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박스 하나 가득, 오래된 종이 냄새가 자신의 것처럼 스민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어떤 건 한 줄짜리 카드였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하나뿐인'이라는 말은 꼭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런 집에서 자랐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꼭 묻고 싶은 말이었다.
"혹시... 아버지를 입양하시려 했었나요?"
공기가 잠시 멈췄다. 마따가 짐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막 결혼한 신혼이었어요. 낯선 땅에서 전쟁을 겪으며, 영수에게 나도 모르게 의지했죠. 정말 그때, 함께 데려오고 싶었어요. 놔두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입양에 이어진 말은 전쟁, 그리고 죽음이었다. 모두가 그 말에 잠시 숨을 죽였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누구도 먼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는 바다의 빛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전쟁, 이국, 한 소년의 얼굴, 그 모든 기억이 한 사람의 주름 안에 겹쳐 있는 듯했다.
"그땐... 모두가 너무 어려웠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린 늘 누군가의 도움 속에서 살잖아요."
그 말이 마음에 닿았다. 그가 발음한 건 '도움'이었지만, 나는 그게 '환대'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안아줌'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간다. 기꺼이 안아줌, 존재를 인정하는 말.
아버지는 이미 그 환대를 받고 살았다. 그게 희망이 되어 나를 회복했다. 짐도 나도 그리고 아버지도. 우리는 모두 환대로 서로를 잇고 있었다.
"짐, 나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내가 말하자, 짐이 뭔지도 모르면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나 리사, 그 노래요. 막사에서 종종 불렀다던. 그 노래 혹시 불러주실 수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낮은 목소리로, 모나 리사의 첫 소절이 방 안에 번졌다. 아버지가 그 옛날 들었을 그 노래를 지금 내가 짐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듣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벅차게 했다. 짐의 허락을 받고 나는 그 노래를 내 핸드폰에 녹음했다.
마따는 와인 한 병을 부엌에서 가지고 와 식탁 위에 놓았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안, 오늘은 자고가요. 어차피 날도 기울었는데." 마따의 목소리는 마치 엄마가 부르던 저녁의 목소리 같았다. 낯선 나라의 집인데 이상하게 집의 냄새가 났다.
"호텔에서 자고 내일 떠나면 돼요."
내 말에 마따는 손사래를 치며 "게. 겐차나"라고 발음했다. 어딘가 서툴러서 우리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지나자 잠시 또 침묵이 찾아왔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 고요는 다정했다. 우리는 서로의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그날 밤, 나는 이층 방으로 안내되어 그 집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마셨던 와인 한 잔이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의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었다.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은, 아니 자고 싶지 않은 밤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을 타고 다니는 알콜의 간지러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었다. 바람 속엔 낯선 흙냄새와 짐이 부르던 노래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괜찮다는 말.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목소리인지, 짐의 기억 속에 남은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나를 덮고,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괜찮다’고 속삭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수는 잘 있나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묻는 눈빛이었다.
"네, 잘 있어요. 늘 짐 이야기를 했어요. 아니 계속 하고 있어요. 제가 주소를 가지고 있었고, 한번쯤은 꼭 오고 싶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 길을 오셨네요."
그 한마디가 가볍게 들리지는 않았다. 육십 년의 세월을 건너 이제야 마주 앉은 자리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한대로, 영수는 나의 하우스보이였어요. 나보다 늘 먼저 일어나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척척 해냈죠. 그 작은 손이..."
그는 말을 멈추고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옆에 있던 짐의 아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엄마도 늘 아버지에게 그랬다. "기침이 사납네!" 하면서도, 말끝에는 다정한 손길이 있었다.
짐은 곧 안정을 찾고, 아버지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래를 잘 불렀다고 했다. 그래서 미군들 사이에서 박수도 받고 온갖 캔디를 받기도 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쑥스러움이 많고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전쟁 중에 노래를 부르며 웃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짐이 갑자기 "진짜!"라며 한국말을 내뱉었다. 그 자신도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 시절 몸으로 배운 한국말이 몇 개 더 남아 있다고 했다. "갠차나" 그가 멋쩍게 발음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괜찮아.'
아버지는 늘 그말을 했다. 어릴 적 실수가 많은 내가 물심부름을 하다가 엎질러도, 자전거를 처음 타다 무릎이 다 까져서 와도. 아버지의 그 '괜찮아'는 나에게 위로이자,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그 단어를 짐의 입에서 들으니 코끝이 찡했다.
잠시 후, 짐이 물었다. "영수,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 건강한가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작게 말했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세요. 치매와 싸우고 있어요. 엄마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전쟁의 기억 속에서 살고 계세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엌쪽의 인기척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짐이 말했다.
"영수와 나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네요. 그땐 그저 조그만 아이로만 봤는데."
부엌에서 나오던 짐의 아내가 말을 이었다. "우린 다 같이 늙어가잖수. 영수도 마찮가지겠지."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윤영수 군의 딸인 나도 벌써 마흔넷이니까. 전쟁 당시 짐의 나이보다 두배는 더 먹은 나이. 세월은 그렇게 서로를 보지 않는 사이에도 많이 흘렀다.
식탁 위에는 어느새 음식이 가득 차올랐다. 짐의 아내, 마따는 분주히 접시를 놓고 있었다.
"마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지안! 너 내 이름을 알고 있었네." 마따와 나는 동시에 짐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짐이 아내 마따에게 보내는 편지를 몇 번 봤거든요. 러브레터!" 러브레터에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웃으며 아직도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박스 하나 가득,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어떤 건 한 줄짜리 카드였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하나뿐인'이라는 말은 꼭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런 집에서 자랐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꼭 묻고 싶은 말이었다.
"혹시... 아버지를 입양하시려 했었나요?"
공기가 잠시 멈췄다. 마따가 짐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막 결혼한 신혼이었어요. 낯선 땅에서 전쟁을 겪으며, 영수에게 나도 모르게 의지했죠. 정말 그때, 함께 데려오고 싶었어요. 놔두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입양에 이어진 말은 전쟁, 그리고 죽음이었다. 모두가 그 말에 잠시 숨을 죽였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누구도 먼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는 바다의 빛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전쟁, 이국, 한 소년의 얼굴, 그 모든 기억이 한 사람의 주름 안에 겹쳐 있는 듯했다.
"그땐... 모두가 너무 어려웠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린 늘 누군가의 도움 속에서 살잖아요."
그 말이 마음에 닿았다. 그가 발음한 건 '도움'이었지만, 나는 그게 '환대'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누군가의 '안아줌'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간다. 기꺼이 안아줌, 존재를 인정하는 말.
아버지는 이미 그 환대를 받고 살았다. 그게 희망이 되어 나를 회복했다. 짐도 나도 그리고 아버지도. 우리는 모두 환대로 서로를 잇고 있었다.
"짐, 나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내가 말하자, 짐이 뭔지도 모르면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나 리사, 그 노래요. 막사에서 종종 불렀다던. 그 노래 혹시 불러주실 수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낮은 목소리로, 모나 리사의 첫 소절이 방 안에 번졌다. 아버지가 그 옛날 들었을 그 노래를 지금 내가 짐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듣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벅차게 했다. 짐의 허락을 받고 나는 그 노래를 내 핸드폰에 녹음했다.
마따는 와인 한 병을 부엌에서 가지고 와 식탁 위에 놓았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안, 오늘은 자고가요. 어차피 날도 기울었는데." 마따의 목소리는 마치 엄마가 부르던 저녁의 목소리 같았다. 낯선 나라의 집인데 이상하게 '집'의 냄새가 났다.
"호텔에서 자고 내일 떠나면 돼요."
내 말에 마따는 손사래를 치며 "게. 겐차나"라고 발음했다. 어딘가 서툴러서 우리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지나자 잠시 또 침묵이 찾아왔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 고요는 다정했다. 우리는 서로의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그날 밤, 나는 이층 방으로 안내되어 그 집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마셨던 와인 한 잔이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의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었다.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은, 아니 자고 싶지 않은 밤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을 타고 다니는 알콜의 간지러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었다. 바람 속엔 낯선 흙냄새와 짐이 부르던 노래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괜찮다는 말.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목소리인지, 짐의 기억 속에 남은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나를 덮고,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괜찮다’고 속삭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