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이어진 계절

창가에 스며든 햇살

by 리앤

눈이 온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창밖에는 느닷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3월 초였다. 그 사이로 스멀스멀 봄 냄새가 스며들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한 달째였다. 눈은 녹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그 사이로 진흙빛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었던 땅은 녹았다가 다시 얼며, 조용히 생명을 품을 준비를 했다. 겉보기엔 고요했지만, 땅 속은 이미 분주했다.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아버지는 그런 이른 봄에 태어나, 늦은 겨울을 마지막으로 하고 떠났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병실, 방 안 냄새를 기억한다. 창밖으로 한 해가 오고 가는 모든 계절을 지켜보았을 것이고, 무거운 눈꺼풀을 슴벅이며 사투를 벌이던 날에는 귀로만 낮과 밤을 구분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마저도 놓았을지도 모른다. 병실의 공기는 늘 묵직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냄새, 생의 냄새가 있었다.


병실은 환자를 바꾸어가며, 마지막을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오래된 약 냄새와, 씻어내지지 않는 시간의 냄새. 누군가의 말처럼, 떠남은 그렇게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이 되어 남았다.


나는 아버지의 부고를 짐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건 미움도 애정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알지 못하길 바랐다. 내게도, 그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은 더 이상 이어질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해열제를 먹으며 얕은 숨만 이어가던 날들, 기억이 사라지듯 몸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눈동자는 힘을 잃었고, 음식은 삼키지도 못했다. 켁켁거리는 기침 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그때 ‘쇄잔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조금씩 남아서 희미해지고,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억을 잃고, 이제는 육체의 기운마저 쇄잔해져갔다. 침대 시트는 차가웠고, 손은 메마르고 건조했다. 바세린을 찍어 손 구석구석을 발라도 갈라진 틈새로 스며드는 속도는 느렸다. 욕창을 막기 위해 자주 몸을 돌려주어도 피부는 붉게 부풀었고, 그때마다 몸은 버석거려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체중은 너무 가벼워, 그의 몸을 잡아주던 딸조차 안중에 없는 듯, 그는 그저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슬픔이나 아쉬움보다는 묘한 평안이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마지막까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살면서 수십번 수백번 불렀을 그 이름을.


"지안아! 우리 지안이가 이제 걷네!"

"지안이가 또다른 지안이를 낳았네. 애썼다."

"괜찮아, 지안아."

"지안아!"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공손한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평소대로 "지안이 왔구나!" 하는 그 말을 끝내 듣지 못했지만,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남긴 흔적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으니까. 나는 그 기억을 희망 삼아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문득, 내 딸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생각했다.


그녀가 기억할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강의하느라 늘 바쁘던 엄마, 틈만 나면 책과 글에 매달렸던 엄마? 시선을 딸에게 옮기자, 마음이 깊은 바다속으로 잠기는 듯했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따뜻한 웃음과 조용한 위로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삶이란 결국 이렇게 돌고 도는구나. 나에게서 너로. 너는 또 다른 너의 아이에게로.


눈발은 서서히 멈추고, 겨울의 마지막 찬 기운도 햇살에 녹아 흩어졌다. 얼었던 땅 속의 생명은 조용히 기지개를 켰고, 햇살은 창문 너머로 방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게 남길 아버지의 기억이, 딸에게 남길 나의 기억이, 그렇게 서로를 거쳐 또 다른 계절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채웠다.


맞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천천히 번지는 하나의 계절이었다.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숨결과 손길, 말과 웃음은 이제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와 남편,그리고 딸까지도 서로를 도우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든 계절과 시간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조용히 살아 있는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가 늘 머물던 집 창가. 해가 창문을 스치며 방 안을 노랗게 물들였다. 나는 딸과 함께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의 부재를 흔적으로 채우고, 또 다른 계절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삶은 계속 되었고, 흔적이 있는 한 사랑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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