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하루의 끝

사소한 일상 속의 연결

by 리앤

딸과의 통화가 끝나자 마침 빗소리가 후두둑 들려왔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환기 차 잠시 열어두었던 창문으로 빗물이 들이쳐 탁자 위가 젖었다. 얼른 창을 닫으니, 방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물기를 닦으며 창밖을 보니, 잿빛의 하늘 아래, 젖은 도로 위를 우산 쓴 사람들이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는 우비에 장화까지 신은 키 작은 꼬마 하나가 우산은 쓰지 않겠다며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져, 비와 함께 흐르는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주말이 더욱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잠시 서 있다가 다 마신 커피 잔과 빈 카레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물을 틀자 보글보글한 거품이 일었다. 그릇을 닦으며, 조금 전 딸과의 통화를 떠올랐다. 목소리 속엔 설렘과 피곤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보스턴 작은 스튜디오에서 혼자 열을 올리며 공부하고 있을 딸을 생각하자 기특함이 밀려왔다. 언제나 자기 일을 알아서 해내는 일이 부모로서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느새 장성한 딸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그 아이의 먼 미래까지 그려보았다. 언젠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종종 나와 남편을 불러 함께 식탁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미소가 번졌다. 그저 딸의 삶을 응원하는 엄마로 남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커피 잔을 씻기 위해 들어올렸다. 커피를 담았던 잔이라 향기가 은근하게 감겨왔다. 그 순간, 아까에 이어 짐이 내려준 커피 생각이 났다. 그날 나에게 내밀었던 커피잔은 투박하고 오래된 머그잔이었다. 손에 착 감기던 그 감촉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았다. 그들의 집엔 새것이라 부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조차 오래된 흑백이었고, 창틀엔 먼지가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그들 부부의 삶을 닮아 있었다. 낡고 단단한, 그래서 오히려 편안한. 이제는 사라진 집의 온기가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숨쉬고 있었다.


그 집에 배어 있던 공기 속 사람의 체온도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올라오던 미묘한 냄새, 그리고 그 위를 따라 흐르던 계피향. 그건 마따가 끓여준 계피사과차의 향이었다. 그 향을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여전히 "지안!"하고 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이제는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쓸쓸했다. 나에게 그 집은 포근함과 위로로 남아 있었다.


마따가 하나하나 내어놓은 그날의 식탁도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근사한 터키음식도, 스터핑도 아니었지만, 소박하게 차려진 빵과 감자요리, 햄, 샐러드가 내게 남긴 건 맛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자리를 내어준 기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접대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속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 밤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따뜻한 맞이의 숨결은 아직 내 호흡 속에 들락날락하며 살아 있었다.


물의 소리를 줄이며 수돗물을 잠갔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고요가 돌아왔다. 그릇을 건조대 위에 올려두니 반짝이는 흰 접시가 정갈하게 줄을 섰다. 커피 잔을 그 옆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나니 부엌일은 끝났다. 14평짜리 집에 어울리는, 작고 단출한 부엌이었다.


다시 창가에 서니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듯했다. 이러다 곧 그칠 것 같았다. 밖에 나가기가 싫어 집 안을 맴돌다 냉장고를 열었다.


"난 이번 주말은 못 가. 토요일도 작업이 있는데, 일요일 하루 다녀오기엔 너무 벅찬 거 같아서."

전화로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장을 보지 않았더니, 정작 나를 위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 안의 텅 빈 선반이 마치 내 안의 공허함을 비추는 듯했다. 오직 나를 위한 장보기를 시작했다. 딸이 싫어하던 고등어를 클릭하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조리를 한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따뜻했다.


세미나 준비는, 학생들의 토론 가운데 무엇을 넌지시 던질지 노트에 적는 일로 이어졌다. '언어로 자기 내면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나는 '언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옆에 '마음을 품어주는 또 하나의 집'이라고 적었다. 그 리고 여백에 나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빽빽이 글을 써 내려가다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내가 주문한 고등어와 무, 야채가 담긴 마트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부엌으로 옮기고 거실 불을 켜자 방 안이 환해졌다. 그 순간, 집이 나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안아.”

그 이름은 오래된 시간의 문을 열듯 내 안에 남았다. 그날 식탁 위뿐 아니라, 하루의 안부를 묻고 이름을 불러주는 평범한 일상 속에도 마음의 따뜻함은 함께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고등어조림을 만들며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비는 이미 그쳤고, 창밖의 불빛들이 하나둘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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