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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Sep 27. 2022

유실된 마음의 정거장



시간이 날 때마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을 짬짬이 읽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책을 꽤 읽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흡입력 있게 집중이 되는 책이다.

아이들이 자습하는 조용한 공강 시간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 교무실에서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마음은 잔잔하게 요동친다.


가령, 이런 문장들에 말이다.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이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중략).......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나에게 말했지. 너무 참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네가 나한테 뭔가를 하라 마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서 꼭 그러리라고 결심했어. 그런데 여전히 참고 있어. 선미야. 무엇을? 많은 것들을. 인간에게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참고 그러는 것 같아.'



최은영 작가의 소설에는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 '참고 참다가 포기한 사람들', 그래서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그러한 자신의 마음조차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주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받은 인신공격, 가부장적인 문화로 인한 남녀차별, 신체적 폭력 등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들 말을 하지 않을 뿐, 인정받지 못한 수치스러운 순간쯤은 하나씩 안고 산다.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는 요령이 있지만, 어릴 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놀라고, 참고, 침묵했다.


그런 자잘한 순간들이 모여서 마음에 끈적끈적한 앙금을 만들고 서른 먹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릴 적 다니던 피아노 학원 앞에서 새를 팔며 어린 소녀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새 장수의 눈빛에 꺼림칙함을 느껴 집에서 펑펑 울던 일,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옷걸이 밑에 웅크려서 귓구멍을 막았던 뺏다 하며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던 일, 초등학교 앞에서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는데 오히려 쌍욕을 들은 일,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이유 없이 몇 대나 맞고도 괜찮다고 했던 일 (....)


이후에도 겪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한 모든 수치스러운 일들. 내가 유독 심한 일을 겪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티 없이 자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모든 순간들 속에서 이해받지 못한 내 마음은 목적지 없이 갈 곳을 잃었다. 기억하려고 애를 쓰면, 금세 되살아나는 환영과도 같다. 유실된 마음은 나라는 인간 안에 늘 살아 있다.


그리고, '그때 너는 왜 싫다고 말하지 못했어?', '왜 늘 참았어?', '왜 너는 네 편이 아니었어?'라고 비난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 '내가 싫다고 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으니깐', '모두 소용없으니깐.'이라는 내 영혼의 대답이 들린다.


어릴 적부터 내 안에 있던, 부모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실망감.


나를 괴롭히거나 의도했거나,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모두 잊었을 것이다. 나의 존재도, 그들의 행동도, 모든 것을 잊고서 누구나 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이고 강력한 특권. 나는 그들에게 사과받은 적이 한 번도 없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것을 타인에 대한 '이해'와 '아량 혹은 성숙함'으로 포장하려 했단 것을 책을 읽고 깨달았다.


나의 부모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진작에 포기했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해도 감히 '함부로 이해'했단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패턴의 반복.



마음의 정거장에 멈춰 서서 그런 어린 내 모습을 바라본다. 문장 한 줄에 몇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지금의 내 모습도 바라본다. 내가 가장 친절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해야 했었다. 가 내 자신에게 이해를 강요하고, 쉽게 포기했다. 오만했다.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실된 마음은 깊은 바닥 속에 있었다.

내가 바라봐 줄 때까지, 항상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갈 곳을 잃은 채…… 인정받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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