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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Feb 01. 2022

복수(plural)의 인간'들'

다중자아의 이점

어제 평소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이런 문장을 접했다.


출처: 유튜브 채널 <라이프 루시딩>
1.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신 안에서 마음과 역할을 나눌 수 있기에 대단하다.
2.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내가 나 자신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3.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無我) 이런저런 다양한 상황에서 내 모습을 바꿀 수 있다.
4. 그래서 인간은 복수이며, 어떤 특정한 내 모습을 진정한 나와 동일시하지 않아도 된다.
5. 당신이 무척 외롭다면, 그 외로운 당신과 당신 스스로가 같이 있어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내면 아이끼리의 소통)


*라이프 루시딩: 마음공부 채널, 스페인에서 수도사로서 오래 수련하신 '카밀로'라는 분이 운영하시는데 굉장히 스마트하시다. 아마 인간의 의식 작용과 감정, 그것이 인생에 발현되는 방식을 이렇게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직 부족해서 책과 영상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철학적으로 인간과 인생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상당히 많은 채널이다.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마음과 역할을 분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여러 자아로 분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필요한 '자아'를 필요에 따라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단수가 아닌 복수라고 영상에서 설명한다. 


출처: 유튜브 채널 <라이프 루시딩>

너무 신선하지 않은가?


불교의 무아 사상이라던가, 이런 것은 당연히 많이 들어봤어도 내가 없다는 것은 곧, 아무거나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언어의 아이러니다, 하나가 진실이면 다른 진실도 보통 숨겨져 있다.)


원래 알던 것을 다른 시각에서 낯설게 봤을 때,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가장 흥미롭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 분화시킬 수 있는 '메타인지(제3의 관점)'의 능력이 인간은 다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도 다양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이런 '다중자아'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가를 생각해 봤을 때 그렇지는 않다. 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한 가지 자아만을 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일을 하고 그 능력을 인정받을 때의 자랑스러운 자기 자신, 능력 있는 자기 자신을 '고정된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외롭고 소외된 자기 자신을 '고정된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사람 고유의 자아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내 모습에 집착하거나, 경멸하거나, 갈망하게 된다. 그것이 불행의 서막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상황에 따라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여러 가지 내 모습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면, 나는 지독하게 외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용감할 수도, 비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은 아주 다채로울 것이다. 마치 연극 속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말이다.


갑자기 만화 <유리가면>이 생각난다. 평범한 여주인공인 마야는 공부도 못하고 집도 가난하고 어리바리하지만,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면 그 자리서 배역에 몰입하여 상황과 대사를 몽땅! 다 외워버리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마야의 실제 성격은 맹하고 어벙하지만, 무대 위에서 마야는 소화하지 못하는 배역이 없다.

부잣집 아가씨부터 늑대소녀, 인형, 심지어 로봇 연기까지 그 상황에 몰입해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특출 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연기는 곧 인생이며 무대 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살아간다.

만화 <유리가면>

마야처럼, 천부적인 재능으로 연기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의 인생에서는 내가 배우가 되어 '고정된 나'라는 실체를 버리고 상황에 맞게 '최선의 나'를 연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굽히고 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며 사람의 무의식은 아주 끈질기고 깊다. 그런 점에서 평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인위적 경험'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경우에는 춤을 몇 년 동안 배운 적이 있어, 종종 학생들과 무대에 서는데(작년에는 드디어 고대하던 에스파의 next level 안무를 찍었다) 그럴 때마다 상당한 무대체질임을 느낀다. 음악이 나오는 순간, 그 순간에 집중하고 무대에 서는 배우처럼 또 다른 내 모습을 (몸을 사용하여) 연기하는 일이 아주 즐겁다. 그 순간에는 '몰입'의 감정이 있을 뿐이지, 내가 누구고 어떻게 보이고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교사도 나름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한다고 볼 수 있어 선생님로서의(직장인 자아ㅎㅎ) 자아도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나도 진짜 '나 자신'은 바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라고 느껴진다. 결국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고정된 자아관이 있는 것이다. 잠깐은 잊을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 고정된 자아관에서도 한번 탈피를 해보면 어떨까?


춤을 추는 나 자신도,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수업을 하는 나 자신도, 집에서 귤을 까먹는 나 자신도, 우울해하는 나 자신도, 기뻐하는 나 자신도 모두 나 자신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특정한 나 자신의 모습에 유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훗날 변할 것임을 생각한다면,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도 쉬워질 듯하다. 의식의 전환이다.


결론은, 지금 내가 초라하고 보잘것없더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며, 그것도 고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음악만 나오면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별것이 아닌데, 삶도 그렇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에 제한을 두지 않는 삶에 대해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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