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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선물

by 초동급부 Feb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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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철이에게.

오늘은 날씨가 정말 추웠는데 너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산속이라 여기보다두 더 추웠을 텐데... 게다가 밖에서 근무 스는 거라 더 할 테고. 솔직히 나도 많이 추웠지만 네 생각하면서 견뎠어. 아침에 버스 탈 때도 저녁에 집에 오는 길도 무지 춥고 힘들었지만 넌 나보다 더 추울 거란 생각에 가슴을 활짝 펴고 다녔지.

너한테 편지 쓰기는 좀 이른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받아보는 너야 몇 시에 쓰던지 상관없을 테니깐. 졸음이 오기 전에 졸다가 아침에 오기 전에 미리 써 놔야 해. 아침이 와 버리면 너무 늦어버리잖아. 회사 가서는 쓸 수도 없는데 말야. 근데 뭐가 그리 졸리고 피곤하냐고? 글쎄... 예전보다 잠을 좀 더 적게 자는 게 많이 피곤해. 불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차이인데 말야.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30분 늦게 자고, 저녁에 30분 늦게 자는 건 할 수 있는데 아침에 다섯 시 반에 일어나기는 정말 힘들다. 주저앉고 싶고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만 도중하차하면 아니하는 것만 못한 것이니 어떻게든 노력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 남들도 그냥 다 사는데 나라고 이제 와서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곁에서 자꾸 채찍질 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그러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이두저두 아니니 마음만 심란하구. 일찍 일어나는 거 갖구 되게 이상하게 군다. 남들은 다들 그러고 사는데.

하지만 나에게는 다 이유가 있지 왜 그래야 하는지...(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 너한테 많이 소홀하고 편지가 많이 오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마. 나도 그러고 싶진 않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잖아. 하지만 노력할게. 처음 그대로. 네 목소리라도 한 번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아무래두 힘들테고... 아니다, 그래 많은 걸 바라면 안 되겠지... 그래 그럼 추운 날씨에 몸 건강하고.
다음에 또 편지할게.

1998. 11. 10.

P. S. 낮에 회사에서 쓴 편지 같이 보낸다.
그것만 부칠려니까 내용도 너무 짧고 봉투도 없고 해서 못 보냈어.
많이 보고 싶다.



삼철에게.

안녕. 잘 있었어? 오늘 날씨 굉장히 춥던데
많이 추웠지?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을에서 겨울로
뛰어넘었어. 코트에, 목도리에, 장갑까지.
여긴 추우면 따뜻하게 입으면 되지만 넌...
많이 춥지? 힘들고. 게다가 산속이라 체감온도는
더 떨어질 거 아냐... 어떡하니. 너 추워서.

어젠 정말 졸려서 편지고 뭐고 그냥 자버렸어.
왠지 모르게 몸이 더 가라앉는 것만 같아서... 힘들다.
여긴 회사야. 걸리면 혼나겠지. 네가 초소에서 편지 쓰면
영창 가는 거처럼(걸리면 그렇다고 그랬지?) 나도 걸리면
주금이다. 업무시간에... 하지만 내가 쓰고 싶어서 쓴다.
걸리면 쫓겨나기 밖에 더 하겠어? 까짓 거. 그럼 나가지 뭐.
대신에 네가 책임져. 알았지?

이쁜 종이도 괜찮은 엽서도 없어서 그냥 굴러다니는 종이 중
게 중 나은 걸로 쓰는 거야. 안 그래도 너 생각나는데 편지
쓰니까 면회 갔을 때 네 모습이 떠오른다. 얻어 입은 듯한 윗옷
두 줄간 바지. 작대기 하나 달린 모자. 스킨로션 냄새.
근데 벌써 오늘이 화요일이야. 널 보러 허둥지둥
달려간 게 바로 어제인 듯한데, 너 먼저 보내고 나
갈려구 했는데, 고참들 앞에서의 네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그랬지... 그래서 내가 먼저 일어 서고...

회사에서 쓰는 거라 오래는 아니 많이는 못 쓸 거 같아.
이제 일 해야지. 월급 주고 일 시키는 것두 아까울 텐데.
네가 그랬잖아. 나 회사 취직했다니깐.
누가 돈까지 줘 가면서 널 고용했냐구...
그 말이 맞다. 정말루... 일하기 싫어.


충주 시내 외곽의 산 하나가 내가 근무했던 공군 비행단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기지 외곽경비하는 역할 또한 헌병이 담당했기에 새벽에 초소근무를 들어가기도 했다. 이곳의 초병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바로 이때이다. 10월 말부터 11월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지만 복장과 장비가 겨울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다지 추위를 타지 않는 나 또한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에 온몸을 떨어야 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키세스 시위대처럼 초소에 비치된 우비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얼마나 자세한 이야기를 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보니 나의 열악한 처지가 그녀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고 잠도 많은 그녀가 나를 알고 또 나와의 짧은 만남을 가진 이후에 더욱 힘겨워진 듯하다. 부정적인 작용이 더 크다.


그녀의 처지 또한 어째 나와 비슷한 같기도 하다.

주저앉고 싶고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그녀보다 내가 훨씬 컸을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주어진 얻어 입은 듯한 윗옷, 두 줄간 바지, 작대기 하나 달린 모자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반면에 역시 내 의자와 상관없이 주어진 스킨로션은 편지 속 그녀처럼 나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돼 주었다.


업무 중 포스트잇에 급하게 쓴 편지지만 나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짧은 만남 이후의 한동안을 항상 앓고 마는 그녀이지만 또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음 편지에는 더 밝아져 있기를 바라본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의 이 시기에, 내 성인 이후의 삶에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깊게 사유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녀를 만나 사랑했지만 그녀가 내 곁에 없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명확하다.



역시 그녀는 내 일생에 두 번째로 큰 선물이다.

첫 번째는 우리 아들 쭈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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