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이에게
잘 있었니? 요즘엔 뭐 하고 지내? (하나 마나 한 질문이지?)
그래 오랜만인 거 같애. 너한테 편지 쓴 지가. 그렇지? 자꾸 혼동이 돼서, 답장은 아니 너한테서 편지 한 통(2통 빼고) 날아온 적 없고, 간혹 듣는 네 목소리도 전화 끊고 나면 내가 누구랑 통화를 한 건지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게다가 6주에 한 번 아니 어쩔 땐 그 보다 길게 너를 보지 못하니 내가 너를 정말 아는 사람이기는 한 건지. 또 네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는 있는 건지 헷갈려.
그래서 며칠 혼자 생각했었어. 너를 아는 사람은 분명한데, 둘의 공통된 화제도 없고, 맨날 나는 거의 내 얘기로 시작해서 내 얘기로 끝나잖아. 사는 게 재미없다는 둥, 회사 다니기 싫다는 둥 이런저런 얘길. 그래도 내 딴엔 쓰는 거라고 쓰지만 읽는 네 입장은 한 번두 생각해 본 적 없구... 그래서 생각한 건데 지루하고 재미없지? 다 알어. 근데, 그럼 나 어떡해야 하는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 널 위해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데 말야. 마음만 그렇지 것두 잘 안되고 자꾸 자신이 없어져. 편지 쓰는 게. 또는 그 밖의 다른 이유는 아냐. 그냥 내 마음속에서 그래. 내가 뭘 더 원하고 바라는지 모르겠어. 나 참 바보 같지. 그래 언제나 은경이는 바보인 거 같아. 예나 지금이나.
근데 우리 정말 아는 사이 맞는 거지? 다른 때는 안 그랬는데 요 며칠사이 네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니? 물론 멀리 있기도 하지만.... 글쎄, 갑작스레 더 먼 곳으로 가 버린 듯한 느낌이야. 그럴 수도 있지. 혹시 군화 거꾸로 신을 생각하고 있어? (하하 농담)
요 며칠은 기분이 괜찮았는데, 사장두 없구 또 몇 사람 출장 가고 우리 부장님은 휴가고... 근데 월요일부터 다 나와. 괜히 회사 가기 싫은 거 있지. 졸리면 탈의실 가서 쭈그리고 앉아 졸다 나오고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이젠 그런 자유도 오늘로써 끝이야. 이런 자유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 경우래. 어쩔 땐 탈의실에서 졸다가 우리 부장님 발소리 듣고(여자거든) 놀라서 일어나다가 발을 삐끗한 적두 있었어.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초라하고 비참했었어. 회사에 관한 얘기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지만 그냥 대충.... 그 정도야. 12시부터 점심시간인데 다들 나가고 우리 점심 먹고 있는데 12시 반도 안돼서 들어온다. 그럼 1시까지가 점심시간이래도 그냥 앉아서 일해야 하고.... 사는 게 참 그렇다. 매일 좋은 얘기 좋은 말들을 써주고 싶었는데, 그게 참 안된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하소연이 시작되고 내 편지 받는 넌 혹 더 스트레스받지 않니?
인제 정말 겨울이라 따뜻해지기는 힘들 거 같네. 감기 조심하구. 내복도 꼭 챙겨 입구. 거기는 산속이라 꼭 내복 입어야겠더라.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깐 꼭 내복 입어. 아니 설사 있더라도 내복 안 입고 얼어 죽는 거 보다야 낫지 뭐.
1998. 12. 4.
P. S. 아까 뉴스에 보니까 공군에서 미사일 잘 못 쏴서 난리 났던데.
군 기강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같던데 너네는 괜찮어?
분명 몇 명 짤리고 난리 났을 거야. 인천 어딘거 같던데.
당분간은 너희도 좀 힘들겠지. 헌병하고 방포는 상관없나?
잘 모르지만 그래두 걱정돼서 그래.
본격적인 부작용의 발현이다.
혼자 열심히 편지를 써서 보내도 돌아오는 건 없다. 그러니 자신의 일상과 하루의 소회를 적는 일이 많다. 직장생활이 편하고 즐거울 리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는 직장인의 여가가 넉넉하고 활기차기 어렵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오면 물은 것도 들은 것도 없어 어안이 벙벙하기 일쑤이다. 특박은 또 어떠한가? 나오는데 하루 가고 들어가는데 또 하루가 간다. 온전한 단 하루조차 확정된 끝의 절대적 지배로 더 짧고 아쉬울 뿐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내 남자친구 남친인지 넘에 친구 넘친인지 모를 존재가 야기한 어정쩡함이 원인이다.
그래도 편지가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까, 읽을 내 걱정을 한다.
날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고 또 당연히 내게 바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이나 유니콘도 아닌 것이 대개 상상 속에만 존재하여 보거나 만지기는커녕 연락조차 시원하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의 기분이나 마음에 따라서 갑작스레 더 먼 곳으로 가버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급기야 군화를 거꾸로 신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누나라고 부르라던, 참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던 그녀였는데 말이다.
이러한 불안한 지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300 통가량의 편지를 지어 보낸 아내는 나에게 사실상의 셰익스피어다. 그녀의 편지들이 다시 준 추억으로 새로운 글을 쓰고 있는 나이기에, 더욱 이 지면들이 소중하고 아내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감사하다.
하지만 인도와 같은 큰 나라가 아닌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한 나라를 내게 준다면 난 당장 아내와 바꿀 것이다.
나 오늘 윌리엄 은경한테 죽으려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