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어.
하루종일은 아니지만,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을 만큼은 왔다.
사람들을 오늘 비를 벌써 봄비라고 하더라. 봄이라... 글쎄, 아직은 봄이 아닌 거 같은데, 계절상으로 보아 봄비라고 해야 맞는 거니? 하기야 봄비든 겨울비든 무슨 상관이람... 근데 난 좀 더 시원스럽게 더 오래도록 왔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어. 아침나절 잠깐 한밤에 퇴근할 무렵에 잠깐.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좋을 산성비만 아니라면 맞기에도 적당한 양이었는데.
사람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난 창밖을 바라봤을 때 비가 오는 게 참 좋아.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건 싫어. 대낮인데두 아주 캄캄하구 청둥번개와 함께 비가 온다면 정말 좋을 텐데.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아니 굳이 카페가 아니더라구 비 오는 걸 바라볼 수 있는 장소라면.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마시면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한 곳을 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진짜 진짜 좋겠다. 넌 그거 아니? 비 오는 날 마시기에 적당한 건 커피가 아니라 코코아라는 걸... (덥지만 않다면)
내가 분위기 잡으니까 안 어울리지. 너 말 안 해도 나 다 알어.
내가 '나는 천상 여자야' 그러면 너 항상 '누가 너보고 여자답데?' 그랬잖아. 안 어울려두. 여자답지 않은 애가 조금 여자답게 굴었다면. 그래서 웃겼다면, 오늘 하루만 참아. 근데 실은 충격이었어.... 너의 그 말 '누가 너보고 여자답데?'...... 그랬니? 지금 와서 새삼 느낀 거지만 너의 말대로라면 난 여자다운 구석이 하나두 없는 거네. 그 여자다운의 기준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사람들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기준에 내가 전혀 못 미친다는 얘기겠지.
그럼 반대로 얘기하면 난 남자답니? 이런... 그렇구나. 그래서 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두 없는 거구나... 그래, 남자들은 그런 여잘 좋아하지. 그래 그랬었어. 난 참 바보다. 너한테 그 말을 수도(?)없이 들었으면서도 그 말뜻을 이제야 깨닫다니.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진 않다. 근데 너 나의 어떤 면을 보고 그런 얘길 한 거야? 분명 느꼈으니깐 얘기 한 거구. 얘기했으니까 빈말은 아닐 테구... 생각 좀 해봐야겠어.
하긴 사람들 그러더라. 여우 하곤 살아도 곰 하곤 못 산데.
난 여우보단 곰에 가까우니까 그래 속 편히 독신을 고수하는 게 낫겠다.
잘 지내. 안녕.
1999. 2. 24.
난 1998년 6월 23일을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단발머리에 청 멜빵 반바지, 아니 멜빵 청 반바지(?)를 입고 백팩을 멘 쌍꺼풀 없는 눈의... 살짝 귀여운 소년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제대한 이후 감행한 쌍꺼풀수술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것은 상당한 시너지효과까지 가져왔다. 굳이 여성스러움의 정도를 따지자면 수술 이후 급 상승했다고 본다. 날짜는 생각나지 않지만 강남의 한 놀이터에서 아프다고 울고불고했던 감행의 밤 또한 잊지 않고 있다.
두 번째 만났던 날은 오히려 더 선명하다.
약속한 카페에 먼저 나와 면바지에 카디건을 입고 얌전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첫 만남의 보이쉬한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날 그녀의 '바보' 발언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첫 키스를 했고 오날날에 이른 것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몹쓸 입술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두 없다고 하지만, 진정 오직 나 뿐 이었을까?1999년 2월은 14년 우리 연애의 28분의 1에 불과하다.
곰도 아니다.
나와 살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고 전과를 봐도 그렇고 눈을 봐도 그렇다.
쌍꺼풀 수술한 곰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세상이 다 아는 것 처럼, 독신을 고수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