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에게...
꽃샘추위인가 봐. 낮엔 따뜻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기 그지없어.
요즘엔 장롱 속에 드라이클리닝 해서 걸어 두었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고 다닌다. 그래도 봄이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봄옷들을 입고 다니지만 난 차라리 따뜻한 게 더 낫겠다 싶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입고 다녀. 이런 추위도 이번 주말까지는 풀릴 건가 봐. 그럼 목련도 피고 개나리도 피고 또 머지않아 벚꽃도 피겠지? 벚꽃이 하나 가득 핀 윤중로를 너와 함께 걸을 수 있을까?
참 우리 '쉬리' 보기로 했지? 잊지 않았겠지?
나 너 나오면 볼려구 일부러 안 봤다. 정말야. 근데 네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예매하지? 아냐 그때 되면 예매 안 해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까 너하고는 영화 처음 보는 거 같애. 영화관에서 말야. 너 나오면 할 일이 참 많을 거 같애. 막상 나오면 생각 안 나겠지만 말야. 정말 25일에 나오면 환상적일 거 같은데... 아냐 괜찮아. 혹시 나 땜에 신경 쓰지는 마. 물론 네가 신경 쓴다고 되는 일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3월에 널 볼 수 있는 것두 어딘데.
실은 정말 난 5월에나 널 볼 수 있는 줄 알았어.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지겹고 짜증나고 또 힘들어도 조금만 고생하면 널 볼 수 있으니까 그 낙으로 산다. 내가 바쁘면 바쁠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질 테니깐. 근데 아직두 확실히 잘 몰라. 3월 말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건지. 그전에 끝나는 건지. 언니(회사)한테 물어봐도 그저 시간이 지나 봐야 안데. 그래서 실은 걱정두 돼. 다른 게 걱정이 아니라 너 보고 날짜 꼭 맞춰서 나오라고 하구선 널 볼 수 없으면 어쩌나 해서 말야. 그래두 희망을 가져야지.
환절기야. 감기 조심해. 너두 건강한 편은 아니잖아. 그때 전화했을 때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니?
무슨 생각땜에 잠을 못 이루는지 모르지만, 많이 잘려구 노력해 봐. 잠이라도 많이 자야 피곤하지 않잖아. 생각 좀만 줄이고, 알았지? 그래, 그럼 잠 푹 자고 어떤 일 인지 모르지만 신경 많이 쓰지 말고. 그러다 병 된단 말야.
잘 있어. 또 편지 쓰고 전화도 할게. 안녕.
1999. 3. 9.
'일정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조직된 군인의 집단'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군대'의 의미이다.
'일정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조직된 임·직원의 집단'
같은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회사의 정의라 해도 전혀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둘 다 서열이 확고하고 임무에 철저하며 자유가 박탈된다는 것도 동일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자유가 제한되고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곳이 군대라면, 일반적으로 자유가 인정되고 예외적으로 제한되는 장소가 회사라는 차이는 있을 뿐이다. 그저 확고한 서열, 철저한 임무, 박탈된 자유의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반론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반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편지 속 그녀의 최근 삶이 그랬다.
지극히 당연하게 내가 더 힘들고, 내가 더 외롭고, 내가 더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생각해 왔으나, 적어도 이때는 그녀 또한 별 다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항상 서로만 생각하고, 서로의 존재로 힘을 얻으며, 외출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6주의 해후를 낙으로 견뎌오던... 우리는 사실상 둘 다 군인이었다.
그 흔한 영화 한 편도 함께 보지 못했을 만큼, 입대 전의 우리 만남은 짧았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