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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l 24. 2024

출가


00운수(주) 운수종사자 노·사 임금협상이 결렬되어 20**년 **월 **일  00:00
버스노선 파업이 진행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대체노선 이용, 자가용 함께 타기, 지하철 이용 등 협조와 이해를 당부드립니다.



일산으로 이사 후 난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등록금 버느라 토익학원 한번 간 적 없고 같은 이유로 MT 한번 가 보지 못. 상 MT때는 중·고생 시험 시즌으로 학원에서 보충수업하기 바빴다. 사법시험은 예저녁에 포기했고 취업준비도 하지 못해 딱히 갈 곳이 없기도 했지만 난 일과 학업을 병행하더라도 좋아하는 형법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내 처지를 아는 선·후배·동기들 모두는 대학원 진학을 반대했다. 난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또 지금 못하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휴·복학을 반복하며 4년 넘게도 했는데 2년 못하랴...


역시 중간고사 시즌으로 평소 저녁 8~9시면 끝나는 수업이 11시 정도에 끝이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출근할 때 타고 온 광역버스가 퇴근하려니 파업이란다. 차편이 축소되어 정류장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또 그 차는 막차였다. 다행히 가늦게 겨우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기사님은 오른쪽 사이드미러 보기를 포기했고 앞유리와 사람들 사이에 끼인 오징어 되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간혹 코미디에서 유리에 얼굴을 대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듯이... 밤이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찌그러진 채 한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집, 내 방에는 평소와 다르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어와 보니 헝클어진 머리의 엄마는 항상 아픈 왼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작은형은 입술이 터져있었다. 부모님의 격렬한 다툼 어머니는 팔을 다쳤고 엄마 편을 들며 말리던 작은형은 아버지로부터 주먹질을 당했다. 두 번의 불륜, 딴 엄마, 소송 등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나는 당장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 가해자게 무슨 짓이 든 싶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가? 아니 내가 그것이기를 포기해야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정서적 의미의 아버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날부터는 어떤 의미의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안이든 밖이든 마주치지 않았고 마주쳐도 외면했다. 그 대단한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에도 참석지 않았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나 주말에는 백수였던 작은형과 방학으로 찾아온 큰 조카와 함께 외부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오직 아버지를 보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다.


큰 형의 둘째 딸이 태어난 날, 어머니는 형수의 산후조리를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우셨고 조카도 집에 돌아가 나와 작은형 둘 뿐이었다. 역시 밤늦게 집에 돌아왔으 그분은 작정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에 대한 대가로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이 돌아왔다. 나도 할 말을 했고 때리면 막았다. 말리는 작은형에게도 주먹질을 했다. 분이 풀리지 않자 아버지는 목검을 들었다. 그것을 사용한다면 나 또한 가해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때릴 테면 때리라고 뒤로 돌았다. 그러자 목검이 바닥으로 내려졌다.


늦은 밤, 나는 당장 필요한 짐을 챙겼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행위를 범할 것 같았다. 그분의 삶이 아닌 내 인생을 제대로 망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다음날 오전 난 조용히 집을 나왔다. 마트에서 손수 닭인지 오리인지 모를 조류를 사 와 끓이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그분의 체력보충을 위해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작업이었고 나는 스스로 가스불 앞에서 무언가 조리하는 광경을 태어나 두 번째로 봤다. 한 번은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안 계셨던 어느 날 직접 라면을 끓이실 때였다.


그 길로 멀지 않은 고시원에 들어갔다. 방학 때면 총무 생활도 했기에 고시원이란 장소는 내게 낯설지 않다. 이후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저렴한 반지하 원룸을 구했다. 그 집은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대각선으로 불과 100M 정도였다. 한 번은 원룸 앞에서 아버지를 마주쳤다. 이후 어머니에 대한 간섭이 매우 심해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지척에 살아도 엄마를 볼 수 없었다.



날이 막 지나고 엄마는 아버지가 출타하신 틈을 타 내게 명절 음식을 주러 오셨다.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돌아가시는 엄마를 배웅하러 나다. 멀찍이 엄마가 집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신다. 난 엄마에게 잠깐 기다리시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길 한가운데서 손을 모으고 무릎 꿇어 어머니께 큰 절을 올렸다. 혼자 명절을 보내면서 못내 맘에 걸렸던, 설날 드리지 못한 뒤늦은 세배였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이기적인 아들의 참회이자, 가여운 내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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