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참여를 통해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신다고만 들었는데, 옷차림과 표정까지 밝아진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엔 너무도 흔쾌히 밥값을 주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업하는 아주머니가 도서관 앞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니 자주 가서 먹으라고도 하셨다. 난 왠지 모를 꺼림칙한 감정이 앞서 그곳에 가지 않았다. 동일한 상황이 두어 차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짜증을 내며 꼭 가서 먹으라고 하신다. 그것은 권고사항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아주머니와의 만남을 종용했다.
친한 친구가 오랜만에 도서관에 왔다. 집에도 자주가고 신세가 많은 녀석이라 난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함께 그 분식집을 찾았다. 각별히 챙겨주신 김밥과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음식값도 받지 않으셨다. 감사하다는 정중한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난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즈음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패악질은 절정에 달했다.
난 수능준비에 여념이 없었기에 어머니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나름의 희생을 감수하며 그토록 원하던 법대에 진학했고 아버지에게 손 벌리기가 더욱 싫어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밥값요구가 없기에대화라 할 수 있는 말의 오고 감또한 없었다. 그저 느껴지는 분위기 상 아버지가 전과 달리 많이 침체되어 있다고만 여겨지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아버지의 부름을 전했고, 아버지는 나에게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검찰에 끌려가게 생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동업자들과의 사업은 초기와 달리 종언을 고하여 이를 정리하던 중에 이해관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검찰에 끌려가요?”
나의 질문이었다. 사업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민사적으로해결해야 할진대, 왜 검찰이 출현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지체 없이고백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동업자였던분식집 아줌마와 불륜을 저질렀다.상간녀의 배우자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어 간통으로 피소를 당할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눈치가 그렇단다.그때는 간통죄가 존재했고 그것은 작은 죄가 아니었다.
소부허유 문답하던 기산영수가 예가 아닌데 난 진심으로 내 귀를 씻고 싶었다. 아버지가 막내아들에게 그 모든 사실을 고백하는 자리를 가엾은 어머니는 끝까지 함께 하셨다.
쌤통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버지가 걱정하는 상황은 집안 망신이기에 난민사소송법강의를 해 주시는 현직 변호사교수님께 전화를 해 사연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다. 학생들과 간혹 호프도 즐기시던 젊은 교수님의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결국, 우려하던 간통은 사건화 되지 않았고 나는 변호사의 조력 없이 스스로 답변서를 쓰는 등 민사소송에 대응했다. 멋진 아버지를 둔 덕에 학부생이 조기에 실무까지 처리하는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래도 자식이라는, 법대를 다닌다는 의무감에 필요한 응소를 해 나가는 나를 보고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우짜다가 저놈을 낳아 법대를 보냈으까잉~"
역시 걱정이 크셨던 어머니의 안도의 탄식이었다. 우짜다가는 좀 빼지...
나는 2학년 때 입대하여 제대 이후에는 모든 비용을 홀로 감당했다.
학창 시절 나의 당면과제는 언제나 등록금이었고 최종목표는 졸업이었다. 일부라도 장학금을 받으면 삶이 편했기에 사법시험이나 법조인이 아닌 오로지 학점을 위해 공부했다. 덕분에 24학점 풀 강의에 24학점 A+라는 전인미답의 성적으로 법대 수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C+도 있었다. 1학년부터 4학년 전 학부과정 중에 가장 낮은, 더군다나 전공이었던 그 과목은 다름 아닌 민사소송법이다.
나이가 들고 생각이 커가면서 나는 이 부끄러운 사건의 분식집 아줌마에 대해서 간혹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분식집 그년이라 부르는 그 사람과 나를 도대체 왜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일까? 뒤늦게 안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폭언과 폭력들 그리고 엄마에게 들었던 그녀와 관련된 뒷 이야기를 종합하고도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엄마는 알면서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뒤늦게 엉뚱한 계기로 깨달은진실은 두 번의 불륜보다도 훤씬 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등록금을 번다는 핑계로 부러 외면했던 내 엄마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인내하고 또 인내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엄마가 미치도록 가여웠다.
주말에 난 호수공원으로 혼자 산책을 나갔다.
잠시 쉴 요량으로 나무그늘 밑 벤치에 앉았다. 옆에는 네댓 살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돗자리 위에 앉아 막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가 귀여워서 난 유심히 한참을 보았다. 엄마가 밥을 먹으라 해도 아이는 풀을 뜯고 먹는 용도로 준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파며 해찰을 부린다. 몇 차례 하지 말라고 해도, 주는 음식은받아먹으며아이가 젓가락으로 땅을 찍자 도시락 바로 옆까지 흙이 날아왔다. 화가 난 엄마가 그것을 뺐는다. 아이도 화가 나 달라고 덤비며 엄마를 밀친다. 엄마는 아이에게 등짝스매싱을 날린다.
"그렇게 못되게 굴 거면 다른 엄마한테 가~"
"엄마 집에 갈 거야. 너 오지 마, 네 엄마 안 해!!!"
등짝 스매싱에도 굴하지 않던 아이가
"딴 엄마 싫어, 나 딴 엄마테 안가!!!"
"나도 울집 갈끄야~~ 엄마 미워!!!"
아이는 큰 울음을 터뜨렸고 입속의 씹다만 김밥이 돗자리로 떨어진다.
딴 엄마... 김밥... 다른 엄마한테 가지 않겠다고 우는 아이???
‘돈오’ 한꺼번에 깨닫는다는 불교용어였던가? 그 순간 영화 식스센스 말미에 빠르게 넘어가는 지난 장면들처럼 내 머릿속에 단편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고 퍼즐의 마지막 피스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버렸다.
다 큰 청년이 다른 엄마에게 가지 않겠다는 아이가 되어 대낮 공원에서 통곡을 했다. 그 소리에 울던 아이가 외려 울음을 뚝 그쳤고 엄마와 아이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