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악상이 떠오른 슈베르트가 냅킨에 악보를 그린 것처럼,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앉은내책상위A4용지가 새우깡인양 자꾸만손이 가 쓴 것이다.
물론 난 슈베르트와 같은 천재와는 거리가 무척 멀고 작품(?) 또한 처참함을 잘 알고 있다.
서울로 이사와 첫 집이었던 반지하를 떠나 무리해서 구입한 집은 많이 좁았다. 부모님이 여기저기 많은 집들을 둘러보셨다.그중 엄마의 꿈에 나온 빨간 벽돌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엄마는 꿈 때문에 좁은 곳에서 산다는타박을 자식들에게 듣기도 하셨다. 그래도 반지하 포함해서 3층인 그곳의 임대수익, 엄마의 급여 등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었고 건물은 작아도 남는 자투리 땅이 있어 텃밭으로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동네가 재개발되어 괜찮은 금액으로 넘기고, 그때만 해도 핫했던 일산에 번듯한 새집을 장만해서 이사할 수 있었다.
위의 걸작을 탈고한 그날에는 나보다 11살 많은 큰 누나가 이사 인사겸, 둘 중 동생인 딸 조카 하나만을 데리고 친정에 왔다. 새집이 좋아 보였는지 어린 조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조른다.
엄마, 우리도 이사 가자. 이사 가는 게 얼마나 힘든데??? 돈도 없어... 만 원짜리 몇 개만 있으면 가잖아. 가자 응?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는 즐거웠고 아버지 또한 밝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만 혼자 즐겁지 못했다.
바쁜 누나가 자주 오지도 못하는 데다 둘 만의 방문 또한 처음이라,큰 딸과 딸 손녀를 먹이기 위해 갖은 정성으로 식사를 준비하며 각별히 챙기시는 엄마의 모습에 그랬다. 앉아서 대접받는 큰 딸, 아니 그보다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하고 딸과 손녀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엄마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편치 못했다.
'누나가 좀 해!!!' 내 속엣말이었다.
아마 손님이 큰 누나가 아니라 작은 누나였다면 난 열 번이라도 이 말을입 밖으로꺼냈을 것이다. 큰 누나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수 없는 누나의 삶에, 조카의 집투정에 내 맘이 더 아팠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하며 누나는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최고의 명분 속에는 항상 집을, 아니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음을 잘 안다. 누나는 그곳에서 한남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조카가 태어났다. 큰 누나의 결혼식날 중학생이었던 난 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혼자 내 첫 조카를 돌봤다.
그녀의 결혼식날 그녀의 아들에게 먹일 점심을 만들기 위해 카레를 봉지째 넣고 한 시간 가까이 끓였는데 먹을 수 없었다. 뜯고 보니 그것은 분말카레였다.설명서대로 적당량의 물을 붓고 다시 끓인 카레죽을 조카는 먹지 않았다. 매여~ 맛없떠...
동네 슈퍼마켓 운영, 개업이나 장례식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환을 만드는 일, 식당 일 등 힘들게 고생한 누나다. 못난 남자를 만나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게다가 불행히도 그 남자는 아버지와 비슷한 면이 적지않아 물심양면으로버거운 삶을 살았다. 이런 큰 누나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참으로 오랜만에 따뜻한 부모, 아니 엄마의 품을 찾아온 것이다.
고된 삶의 한 끼를 어미에게 마음 편히 의탁하는 큰 딸, 그 노고를 알기에 지극한 정성을 먹이는 엄마,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 안고 가슴 아픈 나...
누나가 일을 하다 보니 어린 두 조카가 외가에서 자란 시간이 길다.그 때문인지 조카들은 항상 막내 삼촌이 제일 멋지고 좋은 삼촌이라고 한다. 다른 조카들도 있지만 나 또한 이들에게 그리고 큰 누나에게 가장 깊은 정을 느낀다.
누나가 돌아간 이후에 엄마는 내게 어린것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사 가자고 하더라며 어김없이 눈물을 보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