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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l 10. 2024

도우미 아줌마


우리 집은 모두 일곱이나 되는 대식구이다.

하지만 가 중학생이 된 이후 일곱 식구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던 기억 거 없다. 버지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에게 집은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열매는커녕 꽃도 채 피기 전에 서둘러 나무를 떠났으니 5남매의 삶이 영글지 못했음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아버지가 주말에 외출을 하시는 매우 귀한 시간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난 제2의 집인 동네 도서관에 가지 않고 엄마께했다. 그런 귀한 날의 오후였다. 내가 출출해하자 엄마가 맛있는 것을 사다 먹자고 하신다. 엄마가 일을 하셔도 급여가 많을 리 없고 그마저 빠듯하게 정해서 쓰느라 생활비 외 여유 자금도 귀했다.


"엄마 돈 없잖아."


그러자 주머니에서 네 번 접은 만 원짜리 지폐, 5장 정도를 꺼내 펴 보이시며


“엄마 돈 있다 ^^”   

“우아~ 엄마 돈 많다. 웬 돈이야?”


"00 할머니가 주셨어..."

그런데, 엄마 얼굴에 이내 그늘이 드리워진다.




엄마의 세 번째 일은 도우미 아줌마였다.

구청에서 운영했던 공공사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엄마는 출·퇴근하며 독거노인 분들을 돌봐 주시는 일을 하셨다. 격일로 거주지에 직접 찾아가거나 입원하셨을 경우에는 병원에서 간병인의 역할하는 일이다. 식사 준비, 집청소 등을 대신해 드리기도 하고 함께 산책을 하거나 말벗이 돼 드리기도 했다.

 힘들기도 하지만 외로운 어르신들을 돕는 일이라 엄마는 마음이 좋다고 하셨다. 전에 비해 표정도 몸도 편해 보여 나 또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가끔은 알록달록한 중고 비닐봉지에 야채나 생선, 조리된 반찬 심지어 스테인리스 통에 국이나 찌개를 가져오시기도 했다. 돌보는 할머니들이 싸주시는 거라 거절할 수 없으셨다.


어머니는 긴 시간 입원해 계신 00 할머니를 오래 돌보셨는데 그 할머니께서엄마를 무척 좋아하셨다. 00 할머니가 지난 방문날에 고맙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엄마에게 현금을 쥐어 주셨다. 엄마는 내가 드리지는 못할 망정 할머니께 돈은 못 받는다며 돌려주셨는데, 집에 와서 보니 겉옷 주머니에 그것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 몰래 슬쩍 넣어두신 것이다.

뒤늦게 이를 엄마는 다음 방문일에 할머니께 돌려 드리려 했으나 럴 수 없었다. 원에 보니 할머니의 병상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엄마가 퇴근하신 이후 늦은 밤에 할머니는 영원히 눈을 감으다.


무언가를 예감하신 것인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돌아가신 그날은 새벽부터 유난히 엄마를 기다리셨다는 말씀을 병실의 다른 할머니로부터 들으셨다고 한다. 엄마가 방문한 날 먼 길을 떠나셨기에 이틀 후 아침, 발인조차 마친 시간이 되어서야 사실을 안 엄마는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하셨다. 

내 딸 하자던 엄마 같은 할머니셨다 이내 눈물을 흘리신다.


난 그 돈으로 맛난 걸 사 먹을 수 없었다. 배웅도 없이 혼자 떠나신 할머니가 가여웠고 그 일을 통해 마음 아픈 마도 가여웠다. 두 분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하니 나도 눈가가 촉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딸 하자던 엄마 같던 할머니...

내 딸, 엄마 같던 엄마 같던...


너무도 흔한 이 말들이 내게는 생소했다.

내 엄마도 딸이고, 엄마도 엄마가 계셨다.


할아버지·할머니 기일에는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를 지내지만, 외할아버지·할머니 제사를 모시거나 엄마가 찾아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 즈음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두 해 전에 떠나셨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기이다. 하지만 난 아무런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 제사를 준비하시던 어머니께 내가 여쭤본 적이 있다. 마음이 쓰여서가 아니라 그저 너무 달라서 이상해서 엄마는 왜 아빠, 엄마의 제사를 모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외가에 동생이 모신다 하셨다. 그럼 제삿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쓸쓸히 웃으셨다. 그때의 엄마 얼굴에서도 이날과 똑같은 그늘을 보았다.


내 엄마도 부모님이 계셨다. 그분들이 그립고 때마다 제사라도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아직 생존하시는 언니도 자주 찾아뵙고 조카들 그 자식들 만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시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엄마에게 그저 잊힌 존재인 것 마냥 오직 엄마에게는 자식들뿐이다.


여린 몸을 자식들에게 갈아 넣고 텅 빈 마음을 자식들로 채우기 바빴다. 자식들은 앞다투어 당신을 떠나도 스스로가 나무이기에 그곳을 떠날 수도 없는 앙상한 고목이다. 씨너를 클렌징워터로 쓰고 종일 힘들게 일하고 와 차린 밥상머리 앞에서 머리카락이 뽑혀도, 어떻게든 살아서 배고픈 자식 맛난 거 먹이는 게 먼저인 내 엄마다.

내게는 이런 엄마가 있다.



비록 영글지 못한 자식들이지만,

이런 엄마로 인해, 이런 엄마가 계셔서 살아간다.

때로는 그 자식들이 사는 게 버겁더라도 살아진다.


이런 엄마로 인해, 이런 엄마가 계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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