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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l 07. 2024

제2집 살이


빌게이츠였던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것이 마을 도서관이라는 사람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내가 있다. 물론 그 사람의 위상, 지위, 재력 등 내가 열악한 모든 것들은 논외로 한다.

중학생 때 친구 덕에 처음 간 구립도서관은 나에게 있어 제2의 집이었다. 책이나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 없는 PC가 수십 대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구내식당 밥값이 저렴했고 양도 많았다.


지금으로 치면 산아래 숲세권이었건만, 아버지가 계신 집은 나에게 항상 산소가 부족했다. 첫째 큰 누나부터 바로 위 작은형까지 유학, 취업 심지어 동거 등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을 제시하며 아삽(A.S.A.P.) 집을 떠났던 이유도 동일했음을 철들고 깨달았다.


주 5일 수업이 되기 전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이고 방학 중에도 난 도서관에서 살았다.

일찍가서 친구들 열람표까지 대신 받아 주는 일을 독차지했는데, 이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날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투자했다면 난 지금쯤 부장판사? 차장검사? 로펌 대표변호사? 정도는 되어 있을 듯하다. 허나, 그럴 리 없다. 숙제를 하거나 적당히 할 일을 마치면 각종 취미서, 잡지, 통속 소설 등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재미는 다 찾아서 했다. 1인 1일 1시간이라는 시청각실 사용 제한이 있긴 했지만 나우누리, 천리안 등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채널을 이용해 채팅도 했었다.


난생처음 했던 채팅의 기억은 아직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키보드 자판을 습득하지 못한 독수리 중에 상독수리였던 내가 감행했던 과감한 아니 무모한 첫 접속이었다.



삼0’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삼0: 안냐세여? 삼0입니다. (미리 쳐놨다.)

방장: 000님 하이루~

AA: 000님 방가! 방가!

BB: 000님 학생예요?

… … …

삼0: 예

방장: 대학생? 어느 학교 다녀요? 어디 살아요?

삼0: 저 ㄴ6 a  z  (아 진짜 -_-)

AA: ???

BB: 울방 첨인데 소개 소개~

삼0: ㅈ 저ㄴ (ㅠ ㅠ)

… … …

… … …

방장: 자, 얘들아 우리 기도하자.

… … …

… … …

… … …


삼0’님이 강퇴되셨습니다


 

이 방장xx, 누구를 위한 기도야?


아무튼 이때는 책을 많이 읽었고 관심 있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간접체험 또한 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제2집 살이를 통해 발췌독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 한창 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던 나이이었기에, 도서관 장서들 중 제목과 표지부터 분위기가 묘한 책을 골라 뜨거운 대목만 찾아 읽으며 오랜 시간 트레이닝을 했기 때문이다. 대개 "   " 즉, 짧지만 강한 대화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추후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제2집 살이에서 가장 큰 소득은 삶에 있어서 책이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늘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도 일요일이었다.

토요일에도 함께 있었던 친구의 열람권을 위해 아침 일찍 준비하면서도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혼자라면 아버지 기분 봐서 손 벌리지 않고 굶어도 되는데, 어제 점심을 얻어먹은 터라 내가 사야 했다.

도서관에 가겠다고 아버지께 보고를 하는데 영 분위기가 좋지 않다. 그래도 별다른 도리는 없으니 아버지 밥값이 없는데... 조금만... 매일 금전출납부를 기록하며 모든 돈은 항상 아버지가 관리하므로 난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 이 새끼 허구헛날 도서관 가서 공부는 하냐?”

사실 공부 안 했으니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 뒤돌아 조용히 현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와 몇 걸음 걷는데 2층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은 오른쪽에 대문이었고 울타리 없이 바로 길과 건물이 붙어있는 구조였다. 창문아래로 갔더니 아무런 말없이 뭔가를 밖으로 휙~ 던지신다. 그것은 오천 원짜리 지폐였는데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헤매다가 하필 우리 집과 옆집 사이의 전봇대 옆 배수로로 떨어졌다. 비가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수로는 젖어있었다. 오물이 묻은 오천 원을 집어 들고 내려보고 계셨던 아버지께 목례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낸 것이 마음 쓰이셨던 것 같다.

 그것은 평소에 비해 고액이었지만, 나는 참으로 비참했다.  


'왜 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인가!'



언젠가 작은형과 소주 한잔 하면서 이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형 또한 똑같은 경험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형과 나의 환경이 다르지 않으니 전혀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때 작은형은 쏘주를 쭉~ 들이키며 이렇게 말했다.


“집 옆 전봇대에 대가리 박고 죽고 싶더라.”



'살 수 없는 것인가'와 '죽고 싶더라', 결국 똑같은 마음이다.




휴~ 그래...

형과 나의 아버지가 다르지 않으니 전혀 놀라울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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