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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l 03. 2024

머릿물


난 다소 터프한 녀석이었다.

누나가 둘이지만 결혼하고 직장 생활하느라 내가 은근 딸 노릇을 좀 했다. 

가끔은 꽃무늬 그릇에 2개의 튜브에 든 겔타입의 물질 적당량을 짜고 칫솔로 열심히 섞은 다음 엄마의 머리에 칠하는 일도 했다. 엄마는 항상 미안해하시며 머릿물들여 달라고 하셨다.

난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이는 사나이가 할 일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엄마가 부탁할 때마다 어김없이 싫은 소리를 하고 짜증을 있는 대로 부렸다. 막상 하면 또 잘하면서 말이다.


어느 휴일, 마침 작은 누나가 있어 엄마는 누나에게 머릿물을 들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싫어하기도 하지만 아녀자가 있으니 사나이가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할 터, 근데 누나는 나보다 더 싫은 티를 내고 정색을 한다. 짜증 내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 있으랴마는 나는 작은누나그 모습이 유독 싫었다. 이후부터는 엄마의 머릿물 부탁에 대한 나의 반발이 현저히 완화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잦아들었고 집을 떠나기 직전에는 웃으면서 딸 노릇을 했던 것 같다.


가르마를 중심으로 두피에 가까운 새 하얀 뿌리를 중점적으로 칫솔로 잘 칠하고 한 방향으로 넘겨가면서 빠짐없이 염색약을 발라야 한다. 특히 얼굴 이마를 둘러싸고 있는 앞 머리 가장 잘해야 한다. 귀밑머리와 뒷머리 빼먹는 경우가 있어서 두 번씩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헤어는 변화무쌍했다.

염색 후 머리가 자라 흑백대결의 장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쇄소 염료가 묻어 있어 탈색 후 염색을 해야만 하는 고급 과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시간은 현저히 단축되었다. 나의 스킬이 늘기도 했겠지만 염색해야 할 머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만져주면 졸리기 마련이어서 엄마도 내가 염색해 줄 때 가끔씩 졸곤 하셨다.


이런...

졸고 있는 엄마 머리에 물방울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눈에서 갑자기 왈칵 쏟아진 것이라 나조차도 막을 틈이 없었다. 졸다 놀란 엄마가 뻘떡 일어나 물으신다.


그리고 정확한 눈물의 연유도 모른 채 이내


으째 울어? 어디 아퍼?
삼철아 울지 마, 내 강아지 울지 마~

유독 듬성한 윗머리를 칠하다 칫솔에 묻어 나온 범상치 않은 머리카락 무리들이 터프가이를 울리고 말았다. 돈 몇 푼 버는 엄마의 전날 저녁 유세에 대한 아버지의 강한 응징이 있었음을 뒤늦게 안 것이다.


이윽고, 머리카락들이 엉킨 칫솔을 보며 울고 있는 내 모습에 지난 저녁들켰다는 것을 안 엄마는 내게 큰 죄라도 지은 듯...


괜찮해, 괜찮해! 엄마는 괜찮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또, 이렇게 말하고 싶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난 괜찮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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