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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l 28. 2024

새 나무


1998 623일, 그녀를 처음 만다.

다음 달 13일입대 했으니 그녀와 나의 20일 정도였다. 우리에게 연인이라는 확약도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었다.


새내기 첫날 도서관 한자리를 차지하며, 보란 듯이 사법 시험에 합격하겠노라던 내 꿈은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고 군대라는 장벽 줄곧 마음 불편했다. IMF가 한창으로 너도 나도 군대에 갈 그 무렵, 친구들과 함께 길어도 외출이 많고 편하다는 공군에 지원했다. 당시 공군은 시험을 통과해야 입대할 수 있었다. 직전학기 학점이 3.0을 넘어 나는 무시었고 다른 넷은 시험을 치렀다. 녀석들은  떨어져 결국 나 홀로 공군이 되었다.


군대에서 이걸 하고 저걸 해서 제대하면 걸 이루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군대에 가는 이 땅에 건실한 청년들도 많겠으나 못난 나는 별생각 없이 군대에 갔다. 훈련소에 입소하면 외부와의 연락이 완벽히 차단되는 1~2주의 기간이 있다. 그때는 편지가 와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담배도 태울 수 없어 흡연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던 시간이 지났다. 당연히 급선무는 뒤늦은 편지의 전달이다. 내무근무라는 당번 동기가 드디어 편지들을 수령해 왔다. 재치만점이었던 그는 혼자 입으로 북소리를 연출하며 편지가 적게 온 동기부터 전달식을 거행했다. 전달자의 효과음과 동기들의 기대와 탄식에 시상식 분위기다. 친구들 모두 군대에 갔고 가족 중에 살갑게 편지를 보내 줄 사람도 없는 나는 남의 일이기에 그저 구경할 뿐이었다. 편지들은 주인을 찾고 이제 단 한 사람 남았다는 당번의 발표가 있은 후 수십 명이 각자의 도구를 이용해 두구두구둥~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녀석이 나에게 다가온다.


1등 00통, *삼철 훈련병!!!

난 한통도 없는 사람이 나뿐이라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이내 내 앞에 20여 통의 편지가 쏟아진다. 청년의 인생에 무시 못할 군대라는 벽 앞에서 체념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내가 입대한 그날부터 한통 한통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다. 입대 당일에 몸이 아파 배웅도 연락도 못한 것이 내내 마음이 아파 집에 전화를 걸어 훈련소 주소를 알아냈다고 한다.


나는 공군 훈련소에서 여자친구가 생겼다.

6주 후 첫 외출에 김포공항에서 나의 도착을 기다렸고, 외출이나 휴가 때면 서울에서 부대가 있는 충주까지 마중을 나오기도 하고 또 먼 그곳까지 함께와 배웅을 해 주도 했다. 상병 때는 쪼그려 앉으면 성인 하나 들어갈만한 상자에 갖가지 과자와 빵, 초콜릿 등을 싸 보내다. 그것은 그해 헌병대에서 가장 큰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받은 자라는 1등의 영예를 또 한 번 안겨주었다.

내게 가장 많은 면회를 왔고 나로 인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나의 복귀어머니보다도 기 인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제대만 하면 다 좋아지고 다 잘될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갖는다.

허나 다시 돌아온 세상은 더 큰 무게로 짓눌러 오기 마련이다. 나의 가난한 고학생의 삶도 그대로였고 가족도 그대로였다. 일찍 학업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여자친구가 데이트비용을 주로 부담했다. 회계업무를 했던 그녀는 가끔 회사 사무용품을 한 두 개 더 구매해서 공부하는 내게 주기도 했다. 신촌 길거리 분식, 홍대 즉석 떡볶이, 대학로 오징어 보쌈은 그녀와 내가 즐겨 먹던 이트 메뉴였다.


대학원에 진학한 1년 후 두 배 가까운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곳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때는 커플링이 유행이었다. 연인 반지를 함께 끼자고 보채던 여자없다고 크게 냈던 나이지만  미안했다. 운이 좋게도 하는 해에 대학원에 성적 장학금이 처음 만들어졌다. 학점이 괜찮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마련해 놓은 등록금의 30% 정도만 납부되어 여유 자금으로 그녀 반지를 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선물다운 선물이었다. 서로의 손을 나란히 대보며 좋아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코스모스 졸업식 날 근사한 식당에 데려가 고생 많았다는 말을 해 준 유일한 사람이며, 연차를 내고 대학원 졸업식에 와준 역시 유일한 사람이다. 이후 그저 그런 회사에 취업을 했고 얼마 후 중견 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이직과 함께 나는 일산  반지하를 그리고 어머니를 떠났다. 어느 정도 삶에 자리가 잡히자 여자친구는 내게 이런 취지를 이야기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되었고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쯤 되었으면 인간적으로 결혼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도 너와 가정을 이뤄 우리 집에서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


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내가 성장해 온 가정이 결코 행복하지 못했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너무도 길기에, 결혼에 대한 기대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나에겐 없었다. 결혼? 까짓 거 하지 못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어머니와의 비공식적 소통 외에 나는 5년 이상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았고 장래에 이를 변경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유지 그리고 이에 대한 여자친구 부모님의 수용 가능여부를 물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축복은 해 주시지 않더라도 반드시 인사드리고 알리기는 해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그녀는 확고했다.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하고 결혼 소식을 전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내 가정사와 그것으로 인한 상처는 오롯이 나와 가족의 몫이다. 전혀 무관한 그녀가, 그것도 지질히 도 못난 남자친구에게 좋은 시절 다 바친 그녀가, 이로 인해 피해를 입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도 생애 한 번뿐인 결혼식에 말이다.


2012년 설날 난 여자친구와 함부모님 댁을 찾았다.

실로 오랜만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와 여자친구에게 각각 복주머니가 그려진 빨간 봉투를 주셨다. 세뱃돈이 담긴 봉투를 보자 나 또한 마음이 아팠다. 사전에 묵계가 있었던 듯 상호 지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없이 필요한 절차들을 정했다. 식과 신혼집 마련 등을 위한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축의금 전액 또한 신랑·신부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정하고 아버지는 길일을 잡아 주기로 하셨다.


1~2개월 후 부모님은 나와 여자친구에게 주말에 종로에서 보자는 연락을 해 오셨다.

부모님은 우리와 함께 금은방에 들러 며느리가 될 사람에게 순금 액세서리세트를 마련해 주셨다. 결혼식 비용 사실상 당사자 부담하기에 더 무언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이다. 내게 그것은 이미 우리 가정사에 당사자가 돼버린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여겨졌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한 그녀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 또한 함께 해 왔기에...


2012년 횟수로 만난 지 15년 만에 처음 만났던 그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나는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없이 그저 소박하기만 한 의식을 요식으로, 한 여자의 인생을 온전히 나에게 바치라고 하기가 못내 미안했다. 많이 부족한 나이지만 신부에 대한 사랑은  어떤 신랑보다  컸기에, 남들처럼 당시 유행하던 신랑 축가를 했다.

내 부모님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무언가 하나는 꼭 내가 해주고 싶었다.



사랑 two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나의 아픔을 가만히 안아주는 너

눈물 흘린 시간 뒤엔 언제나 네가 있어

상처받은 내 영혼에 따뜻한 네 손길만

처음엔 그냥 친군 줄만 알았어

아무 색깔 없이 언제나 영원하길


널 만나면 말없이 있어도

또 하나의 나처럼 편안했던 거야

널 만나면 순수한 네 모습에

철없는 아이처럼 잊었던 거야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내겐 너무 행복한 너




이날 비로소 나의 후숙도 끝났다.

나도 내 어머니와 같이 뿌리를 내리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새 나무는 다짐했다.

내 잎이 떨어지고 뿌리가 썩어 몸통만 나뒹굴더라도,

우리의 자식이 예쁘게 꽃 피우고 튼실한 열매로 영글 때까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절대로 외로이 혼자 익어가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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