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아내의 배가 아파왔다.
요리에는 0.1 도 소질이 없는 나는 계란프라이를 해서 아침을 먹게 하고 한참 전에 준비해 놓은 가방을 챙겨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드디어 오늘 이 녀석이 세상에 나올 모양이다.
처음 들었던 아기의 심장소리에 내 심장이 멎을 뻔했다.
첫 번째 임신을 확인하고 두 번째 병원을 방문했을 때 고동소리를 듣지 못한 아픔이 있기에 우리는 너무도 긴장했었다. 아내의 꿈틀거리는 배를 눈으로 보고 태아의 움직임을 손으로 느껴보고도 실감 나지 않던 우리 아기를 드디어 만나기 위해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몇 가지 과정을 거치고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파하는 아내를 보고 있기가 내내 너무 힘들었다. 아내는 무통주사를 원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니 좀만 더 참으라고만 하신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는 고통에 지쳐갔다. 보는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산모는 얼마나 힘들까... 드디어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그것의 효과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아내는 다시 2~3시간의 아픔을 더 겪었다. 나는 마치 내가 태어나는 날인 양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후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4~50분가량 시간이 흘렀을까.
반쯤 넋이 나가 마치 잠결처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3월 3일 새벽 3시에 태어난 나는 6월 3일 저녁 7시 7분에 아빠가 되었다. 참고로 아내의 생일은 9월 23일이다. 간호사분들이 나를 끌고 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가위로 내 아기의 탯줄을 잘랐다. 그것은 엄마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생각보다 쉽게 잘리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이동해 간호사가 아기를 씻기고 잠깐 안아보라며 나에게 건넨다. 아주 잠시였지만 처음으로 내 아이의 체온을 느꼈다.
이후 그 방에서 나왔고 이제서야 나갔던 절반의 넋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뒤 간호사 한 분이 아기를 안고 와 손짓을 한다. 여러 꼬물이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쭈니(애칭)가 누웠다.
정말 미치도록 예쁘다.
'네가 이 아기의 아빠'라는그분의 손짓은 나에게 환희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이내 어깨가 뻐근해지는 부담도 내려 앉는다.
이때, 유리벽 사이로 내 아이를 보며 나는 한동안 없던 꿈이 하나 생겼다.
난 어릴 적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기다렸다.
아버지가 출타하시기... 대문 밖으로만 나가셔도 맘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가능하면 멀리 가셔서 오래오래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아빠가 되면 나는 꼭 내 자식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빠가 되리라.
음식에 고춧가루가 지나치게 많다. 짜다. 국물이 없다. 게다가 밥상머리 훈계는 물론이고 폭력까지 경험하면서 난 이렇게 생각했다.
반찬투정, 음식타박 그것이야말로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
좋은 먹거리가 있으면 언제나 다음 제사를 위해 냉동실로 향한다. 일반 제기와 제사상으로는 부족해 두 벌의 젯 그릇으로, 전국을 수소문해 구한 큰 제상으로 기일을 엄수한다.
난 또 생각했다. 귀신들한테 쏟는 정성에 반이라도 자식들에게 쏟았다면...
딱 80 중반이신 어머니는 올해도 손수 제사를 준비하신다.
그래... 반면교사도 교사다.
아버지의 반면을 평생의 선생님으로 섬기자.
난 가족의 한 사람인 아빠로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살리라.
1.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빠가 되자.
-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갔다 늦게 와도 아빠를 혼내는 우리 쭈니이니 아직까지는 성공이다.
2. 그저 아내가 주는 대로 감사히 잘 먹는다.
- 식사 걱정하는 아내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라면 먹자!!!” 그녀는 오히려 라면 좀 먹지 말라며 타박한다.
3. 가족에게 절대로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 두 말하면 입 아프다. 아빠는 쭈니가 10살이 될 때까지 꿀밤 한 번 때려 본 적 없다.
내 새끼이지만 내 입으로 아이에게 대놓고 새끼라고 부른적도 없다.
4. 명절 당일에는 무조건 처가로 간다. 주로 점심 설거지 이후이다.
- 친정 부모도 부모요 그분들도 딸, 손주, 사위(?) 보고 싶고 이들과 명절을 보내고 싶은 것은 똑같다.
5. 자발적으로 일하는 아내에게 항상 감사하며, 모든 금전관리는 아내의 몫이다.
- 남자는 그저 벌어야 한다.
6. 내 감정의 해소 대상으로 가족을 악용·오용·남용하지 않는다.
- 더 신경 쓰고 조심한다 해도 아내는 물론이고 아이도 아빠의 기분을 너무도 잘 안다.
7. 내 감정과 아이의 개선을 비교형량하여 후자의 필요성이 더 크다 판단되었을 때에만 아이에게 훈계한다.
-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대 더 때린다.' 선현들의 말씀은 대부분 존중하나 이것 만큼은 최고의 헛소리다.
8. 남보다 자식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욱 진솔하게 보인다.
- 나를 다 보이지 않으면 가족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가족에게 내 부족함을 감춰서 무엇을 얻겠는가!
9. 가족 위에 굴림하지 않는다.
- 아빠가 망가져야 가족이 즐겁다. 우리 쭈니는 유독 그렇다.
10. 자식이 너무도 다른 길로 가고자 한다면 나도 한 번은 그 길로 가본다.
- 내 엄마가 나를 안아 주셨던 그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평생 저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로 살자.
이것이 아빠의 꿈이다.
"자기는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언젠가 아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전 세계의 남편들을 긴장시키는, 그들의 CPU 분당회전수를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이 가혹한 질문이 어김없이 내게도 당도한 것이다.
나는 묘하게도 세상 가장 멀다는 머리와 가슴 간의 거리가 그때는 지척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네가 나와 결혼하겠다면 난 너와 결혼할 거야."
"하지만, 난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
"나보다 모든 조건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더 잘 살았으면 좋겠어."
전략적으로도 명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답변은 진심이었다. 지금도 변함없다.
아빠는 번외의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절대로 현실이 될 수는 없어 너무도 슬픈 꿈이기도 하지만...
난 다음 생에
지금의 내 어머니인 삼순이 여사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내 아내인 은경이와 서로 상처없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지금의 내 아들인 쭈니와 이대로 똑같이 오래도록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