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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Oct 23. 2024

꼬인 날



애쁜 은경이가.

삼철.
오늘은 일이 무지하게 꼬인 날이야.
당황스럽기두 하구 내 IQ가 몇인가 의구심도 생기더라. 몬지 궁금하지?
점심을 먹으려구 꽤나 근사해 보이는 중식당에 들어갔어. 겉에서 보는 거만큼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인 거 있지. 그래서 그런지 손님들도 전부 중년층밖에 없었어. 암튼 메뉴판을 받아서 주문을 할려구 하는데 눈 씻구 찾아봐두 그냥 짜장, 짬뽕이 없는 거야. 그래서 종업원에게 내가 당당히도(언니 2명이랑 같이 있었음) 물었지. "아저씨, 요기 메뉴판에 왜 그냥 짜장, 짬뽕은 없어요?" 그 아저씨 하는 말이 삼선 짜장, 짬뽕밖에 없다는 거야. 처음 온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구 참, 쫌 챙피하긴 했지만 그냥 그걸루 달라구 했지 삼선으로.(근데 여기는 다른 데보다 무려 곱절 가까이 비싸더라구.) 주문한 거 나오기 전에 물이랑 깍두기랑 나오더라구 근데 물맛이 영... 재스민차인 거 같더라구, 너 그거 혹시 먹어봤니? 재스민 차, 꼭 무슨맛이냐믄 화장품 물에다 타먹는 그런 찝찝한 기분이야. 몇 모금 마시다 말고 그냥 생수로 달라고 했는데 내 목소리가 컸던지 주위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봤어. 근데 다 그거 마시지 생수 먹는 사람들이 하나두 없는 거 있지. 아마 우리 보고 그랬을 거 같애. '저런 촌스러운 것들.' 하고 말야.
 
암튼 거까진 좋았다. 근데 짬뽕을 받는 순간... 윽~ 내가 젤루 싫어하는(아니 싫어한다기보단 좋아하진 않지) 죽순이 짬뽕 위에 둥둥. 거기다가 삼선이라고 해놓구 해물두 별루 없구. 오징어 먹을려구 한가에서 고기 잡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을 하구. 다른 언니들은 짜장면 시켰는데 기름이 너무 많다구 고춧가루 팍팍 뿌려 먹구 그래 그래두 여기까진 괜찮아 스타일 구기지는 않았으니깐. 먹다 보니 도저히 느끼해서 먹을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또 아저씨(내가 아저씨라곤 했지만 종업원들 모두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메고 꼭 그냥 레스토랑에 온듯한 기분이었음.)를 불렀어. 왜 불렀냐구? 아까 얘기했지. 처음에 깍두기랑 재스민차 갖다 줬다구. 그래서 깍두기하고만 먹으려니까 너무 느끼하잖어. 단무지 달랠려구 불렀지. 또 내가.
"아저씨, 여기 단무지 좀 주세요."
"???... 저 손님 저흰 단무지 없는데요."

헉~ 주위사람 쳐다들보고 키득거리고, 꼭 무슨 동물원 원숭이 된 거 같은 기분.
야! 너 세상에 단무지 안주는 아니 없는 짜장면집 봤어? 난생처음 그런 비싼 짜장면 먹었는데 게다가 단무지도 없다니.. 흑흑, 또 웬 망신, 망신이랄꺼까진 없지만 사람들이 쳐다보고 웃었으니깐... 그냥 모른 척들 하지... ㅜ.ㅜ

좌우지간 우여곡절 끝에 짬뽕 반도 못 먹고 그냥 나왔어.
점심을 먹구 각자 헤어져서(다시 사무실에서 만나기루 하고) 나두 인제 사업장에 가봐야 하는데 시간이 좀 남더라고. 그래서 은행에서 1시간 죽치다가 여의도 한화증권 빌딩을 찾아서 갔어. 건물은 높고 글씨는 잘 안 보이고 해서 간신히 찾아갔지. 처음에 전화로 위치를 물어보니까 엘리베이터 타고 9층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오면 바로 거기라더라구. 그래서 9층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갔는데 화장실밖에 없는 거야.(것도 남자 화장실) 나는 당연히 맞겠지 싶어 확인두 안 하고 그냥 들어 갈려다가 그때 마침 나오는 남자와 정면으로 충돌, 아찔, 또 아찔 참 죽겠더라.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고. 자꾸만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 아저씨를 뒤로 한채 위치를 잘 못 가르쳐준 그 여자를 원망하면서 다시 1층 로비로 왔어. 경비아저씨한테 9층에 이런 사무실이 있냐고 물으니까 없다드라구. 그때 마침 생각나는 게 있었어. 아! 내가 빌딩을 잘 못 들어왔구나… 그냥 너무도 챙피한 나머지 황급히 그 빌딩을 나오려는데 아까 그 화장실에서 부딪친 남자를 또 만났지 머야. 징그럽게 날 보고 웃는 거 있지 내가 좀 이상하게 생각됐었나 봐. 나두 참 띨띨하지 건물이름 확인두 안 하고 그냥 대충 맞을 거라는 짐작만 갖구. 오늘 같은 대 망신을… 쥐구멍이라두 들어가고 싶었어 정말.

쥐구멍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울 엄마가 아침에 비 안 온다길래 가방두 무겁구 해서 우산은 안 챙겨 나왔거든. 근데 비 억수같이 오더라. 쫄딱 맞았지 뭐. 옛날처럼… 참 각박한 세상이야. 나 같이 이쁜(?)애가 혼자 비 맞구 걸어가구 있는데 우산하나 씌워주는 남자 없다니. 인생 헛살았지. 아니다. 비 맞은 내 꼴은 아마 우산 있어두 씌워주기 싫었을 거야.

암튼,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일진이 안 좋은 날 인가 봐. 이런 날은 그냥 얌전히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건데…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자다 갈걸… 그랬으면 이런 황당한 일들도 안 일어나구. 몇 년에 일어날 일이 오늘 하루에 다 일어난 거 같애.

그래두 하나, 너한테 써줄려구 은행 잡지에서 그냥 유머 몇 자 적어왔어. 백조시절 공감하던 내용들도 있고. 그래, 은행에선 참 좋았는데. 오늘 박찬호 경기 보여주느라고 사람이 많더라구. 것두 남자만. 매일같이 들르니 청경 아저씨가 나를 알아볼까 봐 신경이 쓰였었는데 다들 야구 보느라고 정신이 없드라구. 그래서 편안히 앉아서 느긋하게 베껴 적었지. 너한테 써줄려고… 나 착하지? 근데 왜 나 같이 착한 애한테 이런 일들이 일어나냐고요. 그~치.

넌 요즘 뭐하는지 궁금하다. 뭐 할까?
레모나먹구 힘 좀 내고 있는지 몰라. 비타민 C.
편지 또 쓸께. 그럼 안녕. 좋은 꿈 꾸고.


1998. 8. 28. 새벽에


오래전 심심풀이로 인터넷 궁합을 본 적이 있다.

'아내는 기쁘게 요리를 하고 남편은 그 음식을 항상 맛있게 먹는 찰떡궁합'이라는 답이었다.

찰떡의 일환인 것인지 우리는 식성도 비슷하다. 특히 얼큰한 음식을 좋아해서 제대한 후에는 신촌에 매운 짬뽕과 낚지 볶음, 대학로 오징어보쌈을 즐겼다. 한동안은 서울시내 매운 식당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보물찾기 하듯 그곳들을 찾아가며 함께 구경고 걸었다. 도착해 두 사람 모두 좋아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시간대비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난한 연인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데이트 방식이었던 것도 같다.


매운 음식 하면 생각나는 소중한 추억이 또 있다.

나의 뒤늦은 졸업과 취업으로 우리는 변변한 여행 한번 간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비용을 모두 부담할 테니 함께 제주도에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난 그럴 수 없었다. 서로 다투며, 내 부모님도 아직 제주도를 가시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경비를 부담시키면서까지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한 맺힌 제주 여행은 나의 취직 이후에 가능했다. 너무도 행복하고 꿈만 같던 시간들이었다.


2박 3일 중 첫째 날로 기억한다.

공무원인 큰 형의 도움으로 숙박료가 저렴한 수련원에 묵을 수 있게 되어, 바로 앞 흑돼지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곳은 고기도 맛있었지만 청양고추가 너무 맵고 달았다. 점원의 눈치를 봐가며 3~4개의 고추를 주머니에 넣고 숙소에 돌아왔다. 이튿날 그녀는 편의점에서 김치와 스팸을 사서 청양고추를 썰어넣은 김치찌개를 끓여 주었다. 내 생에 가장 맛있는 김치찌개였다.



그녀가 쓴 이날의 편지를 읽으며 음식과 관련한 추억도 떠오르고 낯선 남자와의 민망한 재회에 웃음도 났다. 하지만 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첫 외출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던 그녀가 다시 전처럼 밝은 모습의 애쁜 은경이가 되어 돌아온 것 같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도 나로 인해 힘들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아픈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원인으로 너무 힘든 사람은 다른 원인들에 영향을 받을 경황도 없기 마련인데, 아내의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아내와 달리 이날은 꼬인 날이 아니라 내 걱정이 풀린 날이었으리라.

아내는 나보다 더 밝고 긍정적이다. 사회라는 녹록지 않은 곳에서 많이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내가 집에서만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것도 밝은 아내 덕분이다. 물론, 우리 딸 같은 아들 쭈니가 단연 최고이지만 아이도 아내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오늘도 아내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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