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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Oct 20. 2024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


삼철이에게…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몰라. 바람이 난 것두 아닌데. 왜 그럴까?
힘든 고비는 웬만큼 넘겼다고 했었는데(생각)… 또다시 슬럼프에 빠져든 기분이야. 이런 얘기 써 보내지 않겠다고 하고선 너한테 말한 거완 상관없다는 듯이 또 쓰게 되는구나. 하지만 이해할 거라 믿어. 그냥 누군가 나에겐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다들 나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으니 난 누굴 붙잡고 얘기해야 하나. 물론, 친구가 있지.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조언을 듣는다기 보단 그냥 묵묵히 내가 하는 얘길 들어주고 말없이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내가 하는 일이 옳지 않아도 적어도 나를 믿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아니 백 번이라두 옳다구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아.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싶어서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언니들하고 호프 한 잔씩 했어. 오늘은 기분이 별루여서 그런지 말두 많이 안 하고 그냥 언니들 하는 얘기 들어만 주다 왔어. 푸념들… 나도 속시원히 털어놓고 싶었지만 구구절절이 얘기하기두 싫구 별루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이랑 내 사생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두 우스워서. 그렇다고 나한테 얘기하는 언니들이 우습단 뜻은 아냐. 다만 내 얘기 자체가 우스울 거라는 거. 요즘 들어 자꾸만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곤 해.

아니지, 첨부터 원래 작았는데 못 느끼고 살았는지도… 그럼 아마 사람들은 그럴 거야. 그걸 인제야 알았느냐구. 나 왜 이렇게 생각없구 대책없이 사는지 몰라. 그냥 막연히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나만 뒤쳐진다는 생각. 아니 이건 생각이 아니고 사실이지. 남들은 하나씩 둘씩 배워서 자기 것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나는 그저 현재의 내 생활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사니까 말야.(쉬운 직장을 얻어서 다행이라는 둥.)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잖아. 혹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떳떳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은데 말야. 그 떳떳이라는 기준이 사회의 자로 잰 듯 모든 것이 빈틈없고 허물없는 완벽한, 뭐 그런 게 아닌 내가 나 자신 스스로에게 떳떳했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나보다 더 나은 그 누구를 봐도 절대 작아진다거나 초라하다는 느낌 없이 그냥 나로 만족할 때… 물론 더 나은 모습이어야겠지.

써놓고 보니까 왜 이렇게 말이 꼬이냐.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술) 웬 횡설수설인지. 별 야그를 다했구나.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 이렇게 얘기해 놓고 담에 널 어떻게 보지? 담에 특박 나오면 연락하지 마. 속사정 다 얘기한 게 챙피스럽다. 감기에 술까지 마시니 쫌 이상한걸? 그래두 글씨는 잘 써진다야.

어제는 하두 열이 많이 나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퇴근해서 집에서 죙일 잠만 잤어. 약 기운에 취해서 자고 또 자고 했지. 편지 쓰고 싶었지만 연필 한 자루 들 힘이 없더라. 그래서 그냥 잤어. 오늘은 괜찮구. 매일 써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하루 빼먹으려니까 이상하더라구. 그래두 나 말구두 편지 많이 오지? 너의 힘든 군 생활에 쫌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쓰는 거지만 그래두 편지 못 받는 애들두 많다며. 그리구 너는 나 말구두 많이 오잖아. 편지. 그러니까 하루쯤, 아니 일주일쯤 빼먹는다고 큰일 나지 않겠지. 이렇게 푸념이 가득 섞인 편지는 더더군다나 반갑지도 않을 테고. 잘 읽지두 않구 그냥 넣어버리지? 너한테 이런 얘기를 쓰고 싶은 거 아니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쓰다 보니까 엉뚱하고 이상한 말만 했어. 그냥 오늘이 맘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랬어. 나 혼자 느낀 거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거든. 가끔가다 그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일들이 있어.

아까 낮에 도서관에 들러서 책 반납하구 다시 다른 책 대여해야 하는데 읽을거리는 없구. 사무실에는 들어가 봐야겠구 시간이 없었어. 근데 마침 눈에 띈 게 뭔지 알어?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 그래두 아는 사람이 군대에 있다고 그 제목이 먼저 눈에 띄더라. 그래서 그냥 그 책 빌려서 왔어. 잠깐 읽었는데 참 재미있더라. 너한테서 들은 낯선 용어들도 많이 나오고. 뭐 사제라던가, 또 모르겠다. 어쨌든 그냥 감회가 새롭다고나 할까. 네가 보고 싶어 지더라. 생각두 많이 나구… 이 책 읽지 말을까 봐. 자꾸 너와 연관 지어 생각이 되거든. 으음~ 너두 이렇겠구나! 물론 이 글쓴이는 육군을 다녀오긴 했지만 비슷할 거 아냐. 참 이 책 뒤에 자그마하게 적힌 글을 적으면,

잠들만 하면 기상하지, 먹을만 하면 식사 끝이지
쉴만 하면 집합이지, 움직일만 하면 동작 그만이지
휴가갈만 하면 비상이지, 편지 쓸만 하면 소등이지
공부할만 하면 작업하지, 편할만 하니깐 이제 전역하란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니? 그래두 너희는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너한테 들어서 내가 느낀 바로는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 거 같던데.

안 졸릴 거 같아서 편지를 썼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오늘은 이만 쓰고 다음에 또 써야겠어.
그럼 너두 훈련 잘 받구 맛없는 짬밥에 깍두기, 김치겠지만은 체력이 젤 중요한 거니 맛없더라도 많이 먹어둬. 너 2Kg이나 빠졌다며, 보충해야 할거 아냐. 글구 참, 자대 가서 편지 쓸 때(형한테) 면회가 되기는 하는 건지 이건 꼭 쓰겠지? 더불어 혹 토요일에 면회가능한지, 몇 시부터인지 좀 현한테 알려줘.
 
가까우면 내가 9월 중으로 꼬옥 면회 갈께. 약속.
힘들겠지만은 곧 좋은 날이 있을 거야. 두고 봐. 꼭 그럴 거야.
쫌만 더 참어라. 추석때 되믄 또 나오잖아.
그럼 내 말대루 밥 많이 먹구. 잠도 잘 자구.
다음에 또 쓸께


1998. 8. 27.
새벽 2시 45분에

P. S.  너한테 편지 쓴 이후로는 자는 시간이 자꾸 단축된다.  이러다간 편지에 졸립다는 말만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오늘도 벌써 3시다.


바람이 났는데 뭐...

결과적으로 1998. 6. 23.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는 바람이 난 게 맞다.


반면, 나는 입대한 지 얼마지 않아 그녀를 잊었다.

그녀를 알기 이전부터 나는 군대에 갈 예정이었다. 그녀와의 만남도 나의 입대를 기점으로 끝날 것이며 그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정된 이별에 당일 나누지 못했던 작별인사 또한 자연스럽기에 그다지 서운하지도 않았다. 훈련과 더위가 시작되고 동기인 우리 사이에서 빈번하게 주고받는 여자친구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변하며 그녀를 생각했지만, 단순한 반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잊힘을 가져왔다. 그리고 3~4주가 지나 무더기 편지를 받기 전까지 나는 정말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쏟아지는 봉투들을 보며 깜짝 놀라 잠시 학교 후배들이 단체로 기특한 짓을 한 게 아닐까 생각했으니 말이다.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

"군대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망각의 시간이라고 말하겠어요."

군인이었던 시간들은 내게 꿈을 잊고, 남을 잊고, 나조차 잊은 시간이었다. 또한, 나는 그때에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첫 외출을 나간 후 영원히 귀대하지 않은 두 기수 아래 후임병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날 전역예정이었던 내 옛 친구도 영원히 시골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친구도 그를 쏜 후임도 그 몇 시간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몇몇 군대 안에서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군대는 인생에서 지워도 무방한 시간으로 생각하며 마주하는 것이 병영생활에 있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을 말이다.

 

 

짧디 짧은 첫 외출의 만남 뒤로 찾아온 그녀의 슬럼프,

다른 일들과 결합되었지만 그녀의 외로운 상념들 모두 나로 인한 것만 같다.

어쩌자고 군대 갈 놈을 만나서...


26년 전 갑자기 내 인생 속으로 훅 들어온 그녀를 나는 잊은 적이 있다.

그녀의 질문에 사랑은 '생각'이라고 정의했던 내가 몇 주간 그녀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군대는 망각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많은 편지들을 읽고 그 속에 담긴 나에 대한 끊임없이 무수한 마음들을 다시금 느낀 지금 그녀를 잊은 그 수 주의 시간들이 너무도 미안하다.


입대로 인한 그녀와의 예정된 이별은 착오가 되었지만 그녀와 나의 이별은 확정되어 있다.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과의 이별도 좋든 싫든 이 세상과의 이별도 우리에게 이미 정해져 있다.



먼 훗날,

우리에게 확정된 이별이 찾아오면 그녀는 나를 잊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고도 혼자만 그녀를 잊었던 시간들이 너무도 죄스러운 나는 다음 생에도 아내를 꼭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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