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이가
지금 네가 서울을 떠난 지 꼬옥 여덟 시간 지났구나. 낮에(오후에) 네가 넣은 음성 들었어.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구 내가 쓴 쪽지를 봤다니 것두 다행이구. 혹시 정리하다가 쇼핑백에 있는 걸 모르고 버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거든. 원래는 레모나상자에다 넣을려구 한 건데 쇼핑백 여는 순간 저 앞에서 걸어오는 네 모습이 보이길래 겨를도 없이 던져 넣고 후다닥 닫아 버렸거든... 그래서 어쩌믄 못 보고 버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
참, 저녁은 뭐 든든하게 먹었어? 시간이 없어서 점심두 별루 못 먹었다며. 난 집에 와서 치킨 한 조각 먹구 말았어. 나두 별루 입맛이 없거든...
근데 인마! 내가 노래 넣어주고 가라고 했잖아. 네가 토요일 저녁에 호출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저녁에 통화하면 꼭 넣어주고 가라고 말하려 했었는데 너 호출 안 했잖아. 일요일엔 너 가느라고 바빴구. 너 그때 호출한다면서 왜 안 했어? 물어본다는 게... 섭섭하더라구. 꼭 뭔가 빼먹은 거 같은 게... 넌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지?
그리구 나한테 말할 때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은 빠짐없이 들어가던데 바보야 걱정하지 마. 나 씩씩하구 용감하구 그러니까 아픈데두 없어. 괜히 그런 신경 쓰느라고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 혹 내가 아프다는 말을 쓴다해두 그건 그냥 내 생활일 뿐이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두 없는 거구.
그래 이 말 쓰다 보니까... 너 나한테 선물 하나 해주고 갔더라. 감기... 잉~ 줄게 없어서 그런 거나 주고 가고. 나뻤다 너. 저녁때 되니까 확실히 와닿는 거 있지. 감기가 걸렸구나 하고.
너 보내고 뒤돌아 오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웃으면서 손 흔드는 네 모습이 혹시... 이런 기분 참 싫다. 근데 이런 별루인 기분을 6주에 한 번씩 느껴야 하는 거니?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것두 나아지는 거니? 허전하고 쓸쓸하고. 왠지 모르게 외롭고 무거운 마음. 이런 기분. 너한테는 30개월 금방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꽤 길구나. 고작 1개월하구 2주 지났으니까. 아냐, 그래두 시간은 금방 가.
... ...
네 얘기를 많이 듣고 싶었는데 서로 침묵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애. 네가 얘기 안 해서 그래. 생각 안 난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잖아.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다만 너는 어땠을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본 거뿐이었어. 갑자기 쓸 말이 생각 안나네. 뒤를 무슨 말로 이어야 할지 말야.
다음장으로 넘어가자.
... ...
근데 나 너한테 별루 해준 거 없구. 레모나 한통 사준 거밖에 없는데 너 되게 고마워하는거 보고 내가 더 어찌해야 할지 모를 뻔했잖아. 그리고 그런 거 챙겨 주는 건 네 애인의 몫이지만 우선은 없으니까 누나가 대신 챙겨주는 거고. 너 계속 그렇게 조그만 일에 감동하면 이 보다 더 큰 일엔 너 기절할까 봐 대충 이런 선에서 끝내야 되겠다. 내가 원래 챙겨주는 거 그런 거 좋아하거든. 내가 한꼼꼼 하거든. 건 너두 알지? 너 또 웃지 마라. 웃는 거 같애, 괜히.(뒤에서 흉보겠네. 되게 칠칠맞은 게 팥빙수 섞으면서 그릇 위로 철철 넘치게 젓는 게 하고 말야)
참, 출출하던 차에 잘됐다. 네가 사주고 간 소시지 2개 남았거든. 거 먹어야겠다. 음냐... 맛있는 걸. 아마 그때 너랑 차 안에서 먹었던 때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애.(군대 가기 전에)
가만 보자. 내 팔이 아프다 했더니 벌써 또 다섯 장이 넘었구나. 팔 좀 쉬어야겠어. 잠두 자야겠구. 오늘은 낮잠두 못 자고 쪼끔 피곤하다. 엊 저녁에두 잠을 설쳤거든. 자다가 정말루 열 번은 일어났나 보다. 괜히 자면서 불안하더라구. 잠두 잘 안 오고. 그래서 오늘 7시에 일어난 거거든.
삼철아, 그럼 너두 좋은 꿈 꾸고 나두 잘 자고.
... ...
1998. 8. 24.
A.M. 1:30
기 도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해 나갈 내 사랑은
맑게 흐르는 강물이게 하소서
위선보다는 진실을 위해
나를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바람에 떨구는 한 잎의 꽃잎 일지라도
한없이 품어 안을
깊고 넓은 바다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바람 앞에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선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는
항상 겸허하게 살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삼철이에게.
이 쪽지를 읽어볼 때쯤이면
넌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부대겠지?
지금 여기가 어디냐면. 공항.
너 잠시 내려간 사이에 쓰는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말구 잘 지내다와.
6주 후면 또 나오잖아.
너 가기 싫어하는 모습 보니까
나두 마음이 안 좋잖아.
나두 너 없는 동안 잘 지내구
있을 테니까 너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아프지 말고.
내가 편지 자주 쓸께
이 쪽지를 보고 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 하는 마음에서 쓴다.
자리가 불편해서 글씨도 이상하구
그렇네…
아무쪼록 아픈데 없이
6주 후에 다시 보자.
그럼…
1998. 8. 23.
P.M. 3:30
P. S. 나두 너 보고 싶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