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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Oct 16. 2024

추억의 고수부지

은경이

오늘도 역시 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을 끝으로 나의 하루는 끝나가고 있어.
항상 잠들기 전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항상 무수한 기억들을 생각해 내며 잠을 청했지만 요즈음엔 너한테 편지 쓰고 나면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 또 그런 어두운 기억 속으로 나를 밀어내지 않아두 어느덧 잠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또 혼자 놀라 소리 없이 깨어 뒤척이곤 하지.
하지만 그전보다 훨씬 더 나아진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서부터(너 군대 가는 걸 알기 전) 고정적으로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보기두 했었거든.

한강 고수부지를 갔다 왔어. 아까 낮에. 물론 근무시간에. 마침 63빌딩에 갈 일이 생겨서 거기 들렀다가 걸어서 둔치로 갔지. 비가 그친 지는 오래전이지만 한강은 아직두 물이 줄어들지 않고... 물 색깔은 황톳빛으로 얼마 전 수해의 잔상을 보는 듯했어. 예전에 너와 같이 앉아서 음악 듣던 곳도 물에 잠겨 찰랑거리고 있더라. 근 두 달 만에 가본 한강의 모습이 어쩜 그리 다를 수 있는지. 꼭 지금의 상황 같아. 하지만 것두 나아지겠지. 다시 한번 깨끗한 한강을 보러 가야지.

고수부지에 근 2시간 있다가 사무실에 들어왔어. 유람선은 아닌데 유람선처럼 만들어 놓은 식당 아니? 거기 들어가서 2시간이나 한강만 바라보다 왔어. 혼자라서 쓸쓸하고 외롭기두 했었지만 생각하긴 참 좋은 곳이더라. 난 항상 생각에 생각을 더해도 언제나 그 자리인데... 생각은 뭐 하러 하구 사는 건지... 생각보다야 고민이 많지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사람두 없구. 아니... 그래 혼자 간직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거야.

여지껏 너한테 편지를 쓰면서 엎드려서 쓰는 건 처음이야. 항상 책상에 앉아서 썼었거든. 근데 웬일이냐구? 오늘 오랜만에 스탠드를 장만했거든. 몇 달 전에 깨졌는데 그냥 지내다가 우리 동네 팬시점에서 점포정리 하느라구 싸게 팔더라구. 그래서 기회는 이때다 하구 샀지. 그리구 또 하나의 이유.

네가 그 귀신얘기 한 뒤로는 잠을 잘 수가 없어. 이상하게 꼭 생각 안 나다가두 잠들기 바로 직전에 생각이 나거든. 그래서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스탠드도 없이 깜깜하잖아. 그런 기분 질색이거든. 생각해 보니 열받는다. 너 말야. 내가 귀신얘기 하지 말랬잖아. 낮에는 몰라도 밤에는 정말 까무러칠 정도로 무서워한단 말야. 네 생각에는 여자 답지두 않은 애가 무슨 겁이 많냐구 그러겠지만 그건 네가 아직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구. 어쨌든 다음에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겁주면 너 그날로 나한테 주금이거나 나를 영영 못 볼 줄 알어. 알았지? 이런 거는 확실히 해두고 넘어가야 하는 것.

근데 스탠드 얘기하다 또 샛길로 빠졌구나. 결론은 그거지. 스탠드를 새로이 장만해서 이제는 형광등 켜지 않고 스탠드만 켜놓고도 너한테 편지를 쓴다는 것.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쓰다가는 눈이 나빠질 거 같은걸... 그나마 좋은 시력마저 버리면 안 되는데. 너 위해서 그렇게 된 거니깐 네가 손해배상 해주겠지 머. 나중에 좋은 눈으로 갈아줘. 알았지? 좋은 놈으로. 지금보다 훨씬 이쁜 것으로.

편지 쓸 주소를 가르쳐 줘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믄 안 되겠다. 공부해야지 너. 편지 쓰면 아무래도 쓰는 만큼 시간 뺏길 거 아냐. 그 시간에 더 공부해서 네가 정해놓은 목표에 도달(?) 해야지.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괜히 나한테 편지 쓰느라고 공부 못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 아마 그럴 일도 없겠지만은. 그 무거운 법전까지 들고 갔는데 말야. 그래서 주소는 안 알려 줄래. 알려 줄 주소도 없지만은. 그러니깐 넌 부대에서 내가 보내는 편지만 받아보면 되는 거지. 답장에 신경 쓸 필요 없이... 근데 이렇게 얘기하다가도 내 맘이 언제 변할지 몰라.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네가 들어간 지는 되게 오래된 거 같은데 바로 어제다. 이제 하루가 지난 것뿐인데. 난 꼭 넌 아주 오래전에 떠나버린 거 같애. 기분은 그런 반면 시간은 안 가고. 그래두 처음보단 낫다. 너한테 연락이 되지 않아서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못했을 땐 그땐...

나 피곤해. 삼철아. 그냥 잘래. 앞으론 계속 이렇게 2, 3장 씩만 쓸까 봐. 너두 읽기 수월 할 테고.
그럼 나 잔다. 지금 시간은 너두 잘 시간이니까.
너두 잘 자.


1998. 8. 25.
A.M. 1:45

P. S. 혹시 레모나 뺏겼어?


수해의 잔상을 보는 듯한 황톳빛 한강 물,

대략 두 달 만에 가본 그곳의 모습은 꼭 지금 우리의 상황처럼 달라져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도 전화 한 통 걸 수 없고 보고 싶어도 얼굴 한번 볼 수 없으며 그저 답장 없는 편지만 적어 보냈던 그녀, 그래 우리의 상황과 너무도 닮은 것 같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쓸쓸하고 외로운 두 시간을 보냈을까?


첫 만남의 날로 기억한다. 그녀와 나는 한강둔치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상쾌한 바람을 맞았다. 함께 음악도 들었다. 아마도 ‘마음의 거리’를 포함한 몇 곡의 가요였던 것 같다. 그녀는 강 건너편에 보이는 빌딩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얘기를 했었다. 대화 중에 발을 움직이는 나를 보고 나이가 몇인데 애처럼 발장난을 치냐며, 내게 했던 귀엽다는 말을 기억한다.


귀대 다음 날이지만 오래전에 떠난 것 같다는 기분은 아마도 나와 그녀가 같았을 것이다. 역시 다 얘기하지 않고 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못했을 때보다는 낫다는 말에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던 나였다.



생전 한번 본 적도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는 그놈에 귀신은 왜 그리도 무서워하는지...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혼자 반지하 원룸에서 살던 시절 비 오는 여름날 밤 볼륨을 높이고 공포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큰 낙이었던 나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없다.


반면에 우리집에는 가끔 아내귀신이 등장한다.

나의 걸음걸이만 봐도 기분을 알아맞히고 대화하다 일어서기만 해도 과자 꺼내러 가지? 냉장고에 음료수 다 먹어서 없는데? 콜라 그만 먹지!!! 너무도 정확히 알아맞혀서 간담이 서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난 이렇게 말한다.


너 무섭다. 너무 오래 같이 살았나 보다. 그만 살자!!!


참 한 가지 더 있다. 옥수수를 너무 좋아해서 옥귀라고도 부른다. 옥수수 귀신.


결혼 직전 그녀와 함께 내 형의 집에 방문하여, 예기치 않게 사돈 부부와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다.

우리가 10년이 훨씬 넘은 시간을 만났다고 하자, 그분들이 만나서 결혼하고 애 둘을 낳고 산 시간보다 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그녀와 나는 참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조심스레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무렵 아내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옛 노랫말을 떠오르게 하는 이 질문에 나는 직관적으로 '생각'이라고 답변했다. 오히려 함께 있지 못할 때에 온통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이런 내게 그녀는 사랑은 '신뢰'라고 말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이 말도 자주 떠오르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할 미래의 시간도 언제나 '귀신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귀한(귀할 貴) 믿음의(믿을 信) 밝고 은은한 등불이(등, 등잔 燈) 죽는 날까지 길게(길 長)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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