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동급부 Oct 13. 2024

첫 외출

은경이가

지금 네가 서울을 떠난 지 꼬옥 여덟 시간 지났구나. 낮에(오후에) 네가 넣은 음성 들었어.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구 내가 쓴 쪽지를 봤다니 것두 다행이구. 혹시 정리하다가 쇼핑백에 있는 걸 모르고 버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거든. 원래는 레모나상자에다 넣을려구 한 건데 쇼핑백 여는 순간 저 앞에서 걸어오는 네 모습이 보이길래 겨를도 없이 던져 넣고 후다닥 닫아 버렸거든... 그래서 어쩌믄 못 보고 버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
참, 저녁은 뭐 든든하게 먹었어? 시간이 없어서 점심두 별루 못 먹었다며. 난 집에 와서 치킨 한 조각 먹구 말았어. 나두 별루 입맛이 없거든...

근데 인마! 내가 노래 넣어주고 가라고 했잖아. 네가 토요일 저녁에 호출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저녁에 통화하면 꼭 넣어주고 가라고 말하려 했었는데 너 호출 안 했잖아. 일요일엔 너 가느라고 바빴구. 너 그때 호출한다면서 왜 안 했어? 물어본다는 게... 섭섭하더라구. 꼭 뭔가 빼먹은 거 같은 게... 넌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지?
그리구 나한테 말할 때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은 빠짐없이 들어가던데 바보야 걱정하지 마. 나 씩씩하구 용감하구 그러니까 아픈데두 없어. 괜히 그런 신경 쓰느라고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 혹 내가 아프다는 말을 쓴다해두 그건 그냥 내 생활일 뿐이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두 없는 거구.

그래 이 말 쓰다 보니까... 너 나한테 선물 하나 해주고 갔더라. 감기... 잉~ 줄게 없어서 그런 거나 주고 가고. 나뻤다 너. 저녁때 되니까 확실히 와닿는 거 있지. 감기가 걸렸구나 하고.

너 보내고 뒤돌아 오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웃으면서 손 흔드는 네 모습이 혹시... 이런 기분 참 싫다. 근데 이런 별루인 기분을 6주에 한 번씩 느껴야 하는 거니?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것두 나아지는 거니? 허전하고 쓸쓸하고. 왠지 모르게 외롭고 무거운 마음. 이런 기분. 너한테는 30개월 금방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꽤 길구나. 고작 1개월하구 2주 지났으니까. 아냐, 그래두 시간은 금방 가.
 
... ...

네 얘기를 많이 듣고 싶었는데 서로 침묵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애. 네가 얘기 안 해서 그래. 생각 안 난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잖아.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다만 너는 어땠을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본 거뿐이었어. 갑자기 쓸 말이 생각 안나네. 뒤를 무슨 말로 이어야 할지 말야.
다음장으로 넘어가자.

... ...

근데 나 너한테 별루 해준 거 없구. 레모나 한통 사준 거밖에 없는데 너 되게 고마워하는거 보고 내가 더 어찌해야 할지 모를 뻔했잖아. 그리고 그런 거 챙겨 주는 건 네 애인의 몫이지만 우선은 없으니까 누나가 대신 챙겨주는 거고. 너 계속 그렇게 조그만 일에 감동하면 이 보다 더 큰 일엔 너 기절할까 봐 대충 이런 선에서 끝내야 되겠다. 내가 원래 챙겨주는 거 그런 거 좋아하거든. 내가 한꼼꼼 하거든. 건 너두 알지? 너 또 웃지 마라. 웃는 거 같애, 괜히.(뒤에서 흉보겠네. 되게 칠칠맞은 게 팥빙수 섞으면서 그릇 위로 철철 넘치게 젓는 게 하고 말야)

참, 출출하던 차에 잘됐다. 네가 사주고 간 소시지 2개 남았거든. 거 먹어야겠다. 음냐... 맛있는 걸. 아마 그때 너랑 차 안에서 먹었던 때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애.(군대 가기 전에)

가만 보자. 내 팔이 아프다 했더니 벌써 또 다섯 장이 넘었구나. 팔 좀 쉬어야겠어. 잠두 자야겠구. 오늘은 낮잠두 못 자고 쪼끔 피곤하다. 엊 저녁에두 잠을 설쳤거든. 자다가 정말루 열 번은 일어났나 보다. 괜히 자면서 불안하더라구. 잠두 잘 안 오고. 그래서 오늘 7시에 일어난 거거든.

삼철아, 그럼 너두 좋은 꿈 꾸고 나두 잘 자고.

... ...


1998. 8. 24.
A.M. 1:30



기 도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해 나갈 내 사랑은
맑게 흐르는 강물이게 하소서

위선보다는 진실을 위해
나를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바람에 떨구는 한 잎의 꽃잎 일지라도
한없이 품어 안을
깊고 넓은 바다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바람 앞에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선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는
항상 겸허하게 살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삼철이에게.

이 쪽지를 읽어볼 때쯤이면
넌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부대겠지?
지금 여기가 어디냐면. 공항.
너 잠시 내려간 사이에 쓰는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말구 잘 지내다와.
6주 후면 또 나오잖아.
너 가기 싫어하는 모습 보니까
나두 마음이 안 좋잖아.
나두 너 없는 동안 잘 지내구
있을 테니까 너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아프지 말고.
내가 편지 자주 쓸께
이 쪽지를 보고 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 하는 마음에서 쓴다.
자리가 불편해서 글씨도 이상하구
그렇네…
아무쪼록 아픈데 없이
6주 후에 다시 보자.
그럼…


1998. 8. 23.
P.M. 3:30

P. S. 나두 너 보고 싶을 거야.



입대 후 첫 만남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그녀를 보았다. 2박 3일 동안 그때까지가 가장 행복했다.

첫날이 채 저물기 전부터 외출의 기쁨보다는 귀대 걱정이 더 컸던 것 같다. 첫 외출이니 만큼 가족과의 시간도 필요했기에 그녀와의 만남은 짧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를 많이 걱정하고 또 많은 것들을 주었다.


아내와 나의 성장환경은 너무도 달랐다. 

쌀이나 생수 등 무거운 물품을 배달해 주시는 택배기사님께는 꼭 만원 한 장이라도 드려야 하는 부모님 덕분인지 아내는 누구든 잘 돕고 챙기는 성격이다. 반면에 너무도 확고하게 경제권을 쥐고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인지 나는 나눔에 서툴렀다. 이나 준비물 외에 아버지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요구해 본 기억이 없다. 친분이 있는 사람, 특히 이성에게 선물이라도 받을 때에는 그렇게 부담스럽고 미안할 수가 없었다.


결혼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고 했던가.

아내와 나의 가족은 이런 단적인 대조로 그칠 만큼 조금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결혼을 한 이후에 처가에 가면 나는 다른 나라에 간 것 이상의 충격을 받곤 했다. 존하는 신인 아버지 위주의 신 중심의 중세가 우리 집이라면, 아내의 집은 어머니를 위주로 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애써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려운 내 가족과는 180도 다른 그들 속으로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최근 편지들을 이야기하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로 인해 내가 너의 가족과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도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아내와의 결혼을 통해 또 다른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서 나는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 백편의 유튜브 동영상을 봐도 알 수 없는 크나큰 격차를 짧은 시간에 직접 경험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인연으로 많은 우호적인 인간관계가 저절로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무척이나 값진 이고 실습이다. 또 그것은 내가 남편으로 아빠로 그리고 내 부모뿐 아니라 아내 부모님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많은 것을 깨닫게 한 너무도 좋은 학교가 되어 준 것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남남의 결합으로 인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차이는 곧 다른 세상의 체험이다. 자연스럽게 나의 견문이 넓어지고 생각과 지혜가 커가는 과정 돼준다. 세계일주를 하고 우주여행을 한다 해도 얻지 못하는 것들을 당신의 배우자로 인해 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또 하나의 필연적인 이유이다.



지금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결혼 후에는 해보지 않은 말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고맙다고 해보라.


단지 부부라는 관계만으로도 당신이 고마울 이유는 충분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