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동급부 Oct 06. 2024

캐리비안베이


애쁜이

벌써 몇 주째 계속 비만 오다가 오늘은 첨으로 비가 안 왔어. 그렇다고 햇볕이 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좋은 거 있지. 깨끗하고. 산뜻하고. 왜 비오며는 구질구질하잖아. 오랜만이네...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너한테 다시 편지를 쓰는 게...

나는 또 너 특박 나올 줄 알고 그래서 안 썼지. 편지 못 받아보면 소각된다나 어떤다나 하길래... 헌병대라면서... 괜찮은지 모르겠어. 공군은 헌병이 힘들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 너 공부하러 거기 간 거나 마찬가지잖아. 근데... 아냐 그래두 좋은 점이 있겠지... 네 소식을 통 못 들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형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두 내가 물어보고 싶은것두 별루 못 물어보고... 근데, 너 제대할 때까지 계속 거기에 있는 거야? 진주에? 내가 형한테 듣기로는 그렇게 들었는데... 그럼 너 면회가기는 글렀구나. 짜식. 힘 쫌 써서 서울 가까운 데로 떨어지믄 좋잖어. 왜 하필 제일 먼 진주야. 너무 멀어서 면회 갈 엄두도 안 난다. 참 그럼 특박은 안 나오는 거야? 모르겠다. 넌 대답두 해줄 수 없는데 나만 물어보면 뭐 해... 몰라...

너 생각나? 내가 16일 날 캐리비안베이 놀러간다구 했었잖아. 갔다 왔지롱...
근데 다른 데는 별루 안 탔는데 어깨가 제일 많이 탔어. 그래서 지금 무지 아프고 쓰리다. 아마 허물이 벗겨질 거 같애. 건 그렇고, 재미있었어. 오랜만에.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용인에 9시에 도착했는데 우와~! 사람들 정말 빠르더라. 아침 9시인데두 주차장이 벌써 다 차들로 꽉 찬 거 있지... 대단들 하더군. 암튼. 수영복으로 갈아입구 나와서 젤 먼저 워터봅슬레이를 타러 갔거든. 근데 그게 1, 2, 3번이 있는데 난 뭣두 모르고 1번 줄에 슨 거 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1번이 젤 무서운 거였드라구. 1번이 젤 무섭구 2번은 그냥 그렇구 3번은 원통으로 된 건데 건 애들이 타는 거. 좌우지간 난 1시간이나 줄 서서 그 워터봅슬레이를 탔는데 무서워서 거의 죽을 뻔했음. 그거 타구 나니까 자신감은 생기더라. 다른 것도 탈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 어쨌든 그걸 타구 또 튜브슬라이더를 타러 갔어. 그건 그냥 튜브 타고 내려오는 건데 무지 재미있어. 사람두 별루 안 기다리고. 아마 그걸 10번은 넘게 탔을껄.

그리구 나서 점심을 먹구 실내에 있는 바디 봅슬레이를 타러 갔어. 친구 중 한 명이 자기는 작년에 그거 타구 거의 죽을 뻔했다면서 죽어도 안 탄다고 하는 거야. 더럭 겁이 나는 거 있지. 그래서 어쩔까 망설이다 그래두 이왕 왔는데. 그냥 타자 싶어서 것두 한 시간을 기다려서 탔거든... 근데 역시. 나 역시도 죽을 뻔... 그게 왜 그러냐믄, 너 보면 이해가 더 쉽겠지만 봅슬레이 마지막 내려오는 데가 1.1M 물이거든 그러니까 빠른 속도로 내려와서 퐁당.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물만 먹는 거지. 난 게다가 수영두 못하니까 허우적허우적... 그날 진짜 물 실컷 먹었지... 그리고 제일 마지막 2~4M 파도가,  그게 제일 재미있었어. 파도타기... 너두 한번 가봐. 그렇게 재미있게 노니까 정말 좋더라구. 근데 넌 별루 재미없지. 상상두 잘 안 가고 그런가? 아니믄 또 모르지 작년에 벌써 갔다 왔는지도. 여름휴가 못 간 거 거기서 다 빼고 왔지. 살두 좀 태운다는 게 이렇게 무식하게 되버렸구.

또 TV에서 본건 있어가지구 콜라 바르면 코코아색으로 이쁘게 탄다길래 콜라 발랐다가 벌들이 날아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구. 그래두 그게 지나면 다 추억이 되는 거지 머...

지금 나 알딸딸한 기분에 편지를 쓰는 거다. 속도 좀 안 좋고. 무슨 일이냐구? 실은 오늘 같이 일하는 사람들 하고 한잔 했거든... 한잔이 얼마냐구? 맥주 1,000cc 적당하지 뭐... 그래두 착하잖아. 나 지금 무지 졸립구 피곤한데두 너한테 편지  쓴 지가 너무 오래된 거 같아서 이렇게 글씨두 잘 안 써지는데 쓰고 있잖아. 취해서가 아니라. 오늘은 좀 피곤해. 오늘은 외근하지 말구 사무실에서 일 좀 도와달라길래 컴퓨터 앞에서 하루종일 모니터보고 키보드 두들기니까 어깨두 뻐근하구 눈두 침침하구 그렇다 지금. 상황이 별루 좋질 못해.
하구 싶은 말 많구 못다 한 말두 많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그럼 몸 건강하구 다음에 또 쓸께... 안녕


1998. 8. 19.



한 동안 우울해 어렵사리 친구들과 일정을 맞춰 가기로 했다던 그곳,

그렇게 해주면 다 놓고 올 수 있을 것 같다며, 내게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말해 달라던 캐리비안베이에 다녀온 모양이다. 백번이고 해 줄 수 있지만 연락이 어려웠던 당시는 그 작은 것 하나도 해주지 못했다. 다시 읽어도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다녀온 다음인 이 편지의 보내는 사람만 봐도 다 놓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장을 시키고 온 것 같다. 다시 애쁜이로 돌아온 것이다.


군대에도 일종의 군대 전공이 있다.

공군에서는 '특기'라고 부르는데 수송특기, 관제특기, 헌병특기 뭐 이런 식이다. 이 특기도 학교의 전공 또는 직업이 있다면 관련한 고려가 가장 크다. 나 또한 더 좋고 편한 것으로 알려진 그것을 희망했으나 법학이 전공이라 예상대로 헌병이었다. 이 특기를 수행하는 데 있어 법 지식은 전혀 필요치 않는데도 말이다. 이때는 헌병특기를 부여받고 3~4주 정도 경남 진주 소재 공군훈련소 헌병 교육대에서 추가 훈련을 받던 시기였다. 헌병이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지 않으나 나는 힘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한 많고 탈 많았던 나의 군생활,

그녀는 내게 있어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리고 활력소이기도 했다.

캐리비안베이 콜라 선탠오일 사건은 잊지 못했다. 벌들이 달려와 결국 물로 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생각을 해도 해도 재미있고 놀리고 놀려도 신난다. 초등학생 아들도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녀의 말처럼 두고두고 즐거운, 아주 좋은 추억이 되었다.


결혼 이후에도 아내의 활력소 역할은 계속되었다. 양적으로는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진화하고 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그녀는 남 부럽지 않은 허당끼까지 두루 섭렵하시어 콜라사건 못지않은 해프닝들은 무수히 많다. 최근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위해 이사를 삼천번 한 것이 맹모삼천지교'라는 아내의 말에 아이와 나의 얼굴이 까맣게 되자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빨갛게 변했다. 꽤 괜찮은 유머를 날린 것으로 이해했는데 표정을 보니 아니었다. 은경이는 연기도 못한다.

애들은 끝을 모르는 법, 삼천번이면 며칠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냐며 아이가 놀려 대자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며 정색을 한다. 이럴 때면 매번 대단히 진지하게 아이와 싸운다. 결국 애를 울려야 사안이 종결되기 일쑤이다.



동양화는 여백이 있어 아름답고 수석도 공백이 있어야 명석이 될 수 있으며 보기에도 좋은 음식이 예쁜 그릇에 담겨 있다 하더라도 차고 넘치면 음식도 그릇도 정갈해 보이지 않는다.


빈칸이 있어 더 사랑스러운 그녀이다. 나라고 어찌 빈 데가 없겠는가? 서로의 공란에 한 두자 적어줄 수 있는 우리 부부이다.



남자인 나로서 진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인 나로서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10화 행복을 위한 조리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