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동급부 Oct 02. 2024

행복을 위한 조리법


은경

오늘은 일요일인데 어제부터 통 밖엘 나가지 못해서 또 편지를 한꺼번에 보내게 됐어. 싫어두 할 수 없씀.

……

너 내가 제일 바라는 게 뭔 줄 아니?
뭐 남들은 부자가 되는 것 하구 또 사회적 명성을 얻는 거 하구.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목표로 세우고 또 소원으로 삼기도 하지만, 난 굉장히 소박한 꿈이야. 그렇지만 이루어지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넌 그랬었지. 사랑하는 사람과 무인도에서 단둘이 살고 싶다고. 나두 거와 비슷하긴 한데 좀 틀리지. 난 아주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또 나의 자식들과 정원이 있는 아담하구 이쁜 집에... 주말엔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구 슈퍼마켓에서 남편은 카트를 밀고 나는 물건을 골라 넣구. 우리가 만든 집에 손수 우리가 꾸민 집... 그래 거 생각하믄 되겠구나. ‘편지’(영화)에서 환규와 정인(이름 맞나?)이네 집처럼 아주 행복하게 그렇게. 난 외로운 건 싫으니깐 아이들은 많이... 북적북적대게. 역시 남는 건 형제뿐인 거야. 가끔은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어놓고 브루스도 추고. 서로 말하지 않아두 나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 바라만 봐두 행복하구. 먹지않아두 배 부르고. 내 목숨두 아깝지 않은…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평범한 거 같은데 나이 먹어서까지 이렇게 사는 사람들 글쎄 별루 없는 거 같더라. 그래서 어쩜 한때의 좋은 추억만으로 평생을 사는 게 아닌가 싶어. 좋았을 때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아주 행복하게. 영원히.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냥 혼자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다들 그러겠다. 그냥 평생 혼자 살으라고… 후휴…
그럼 그러지 머. 나 혼자 살지 머… 쪼끔은 외롭게. 슬프게.
하지만 넌 행복하게 살어야 해.



행복을 위한 조리법

첫째, 많은 양의 기쁨을 그릇에 담아 계속해서 끓인다.
둘째, 거기에다 한 양동이 가득 넘칠 만한 친절을 붓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아주 넉넉하게 넣는다. 그리고 큰 숟가락으로 가득 연민을 섞고, 자애의 본질을 양념으로 넣는다.
셋째, 그것들을 함께 젓다가 주의 깊게 살펴서 이기심의 조각이 보이면 얼른 건져 버린다. 그리고 이제 사랑이라는 소스와 함께 식탁에 올리면 된다.



아냐. 넌 행복하게 살 거야. 넌 누구한테나 친절하잖아. 다정다감하구 여자한테 잘해주고, 여자 눈에 눈물 나는 건 절대로 못 보는(너로 인해서 여자 눈에 난 눈물) 그런 사람 이잖아. 넌 그러니깐 너 여자한테 잘해줄 거야. 아냐, 근데 그런 사람이 한눈 많이 팔더라. 너두 그랬잖아 한눈팔았잖아. 그래두 사람이 자기 성격을 고치기란 쉽지 않은 법. 넌 아마 계속 그럴 거 같애.
그러니까 나한테두 잘해줬고 아무한테나...
그런 반면 너 주먹 되게 아펐어. 담부턴 다른 여자들 때리지 마. 장난으로 던진 짱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나두 거의 죽을 뻔(?) 했어. 얼마나 아펐다구. 너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지?

너 나한테는 더 잘해야 해 인마. 난 누나잖아. 한 살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알어?
너 하루종일 학교에서 수업받고 야자 할 때 난 인마. 나이트에서 춤췄고 술 마시고. 에또. 너 유치원 다닐 때 난 초등학교 다녔구. 너 중학교 다닐 때 난 고등학교 다녔다. 그리구 또... 너 고등학생관람가 영화 볼 때 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봤다. 혼자 씩씩댔더니 숨차다.
헉~ 에구구. 인제 이 편지지도 마지막이네. 사다 놓은 거 다 썼다. 담에 사야지. 아니. 네가 사주고 가라. 네 맘에 드는 걸루. 그럼 담부턴 그걸루 써 줄께.

오늘도 어김없이 졸립다. 너두 알잖어. 나 잠 많은 거. 그런 내가 이렇게 시간을 쪼개가면서 너한테 편지 쓰고 있다. 나 정말 착한 누나지? 요즘은 잠두 많이 못 자거든. 그렇게 잠 많은 내가 잠을 많이 못 잔다구 생각해봐바. 미치지. 그래서 거의 차 안에서 자. 아니믄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바로 자거나. 한 시간쯤. 그러면 피곤이 확 풀려. 그래서 솔직히 별루 피곤한 건 몰라. 그러니 혹 걱정일랑 하지마. 물론 걱정 안 할 거라고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나 건강해. 너 가기 전보다 더 좋아졌어. 그래두 뭐니 뭐니 해두 일을 한다는 게 참 즐거워.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것보다.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살아. 물론 별루 힘들지두 않어. 진짜루.

너두 푹 쉬고. 잠두 최대한으로 많이 자구. 밥두 많이 먹구.
그렇게 해. 알았찌?
그래. 그럼 안녕.


1998. 8. 10.



편지에 나는 바람기가 많은 성격으로 20일 정도의 짧은 만남 중에도 한눈을 팔았을 뿐 아니라 여성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는, 그야말로 돼먹지 못한 인간이 되어있다.


사실이 아니다. 아내에게 물어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거 이거 사랑꾼 노릇만 하고 있다가 큰 일 나겠다. 나도 폭로할 거다.


아주 평범하게 살고 깊은 그녀의 굉장히 소박한 꿈!!!

이 편지를 읽고 우리 은경이의 꿈은 이루어진 게 하나도 없구나 생각했다.

참, 딱 하나 있다. 남편은 카트를 끌고 아내는 물건을 골라 넣는 것... 난 끌기만 한다. 함부로 넣으면 혼난다.

 

그녀는 어찌하여 이런 무지막지하게 평범하고 소박한 꿈을 꾸게 되었을까? 늘 그렇듯이 꿈과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먼저, 이 나라에서 정원이 있는 집이라면 아담하다고 할 수 없다. 아파트인 우리집은 정원이 없을 뿐 아니라 난 개집 하나 지을 재주도 없다. 주말에 여행은 무슨, 함께 운동하는 것은 예저녁에 포기했고 주말에 산책이라도 나가자고 하면 갖은 핑계를 다 대며 피한다. 그러다 아들이 엄마랑 가고 싶다고 사정사정해야 겨우 동행해 주신다. 아이도 하나뿐이다. 음악 틀어놓으면 시끄럽다고 끄라 한다. 게다가 브루스??? 아내는 삼치이다. 음치, 박치, 몸치 나도 몸치인 것은 마찬가지다. 브루스는커녕 집에 있는 모 게임기의 져스트 댄스도 해본 적 없다.


하하하, 먹지 않아도 부르고... 먹지 않고 배부를 수 없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밤이면 배가 고프다며 갖은 애교를 부리며 나를 음식의 길로 유혹한다. 맥주를 한잔 하면 탄수화물이 땡긴단다. 둘 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지라 얼큰한 라면을 먹고 나면 이제 달달한 게 드시고 싶어 아이스크림까지 먹어줘야 긴 야식로드가 끝난다. 손이 크고 식탐 식욕은 많은데 양퉁이는 적어 차림은 진수성찬이나 먹는 건 쥐꼬리라 결국 내 배만 번번이 푸울~이 된다.


말하지 않아두... 바라만 봐두... 내 목숨두...  에효~ 누나 나랑 결혼했는지...

나도 그러고 싶다. 그냥 평생 혼자 살으라고... 쪼끔은 외롭게. 슬프게.

 

익숙한 누나 타령도 이번에는 신박하다. 인정한다.

나이트, 술,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 하하하


오늘의 글을 쓰고 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적어준 '행복한 조리법'이 다르게 보인다.



첫째, 많은 양의 인내를 그릇에 담아 계속해서 끓인다.


둘째, 거기에다 한 양동이 가득 넘칠 만한 친절과 배려를 붓는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것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찻 숟가락으로 살짝 연민을 섞고, 자애의 본질을 부처님과 같이 체화한다.


셋째, 그것들을 함께 젓다가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펴서 이기심이나 반발심의 조각이 보이면 아내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건져 버린다.

그리고 이제 한가득 사랑이라는 소스와 함께 꼭! 미소를 띠고 식탁에 올리면 된다.



아내의 행복을 위한 남편 심성 조리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