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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Oct 30. 2024

깜찍이 소다

깜찍이 소다


이유 Ⅰ

이별한 순간부터
눈물이 많아지는 사람은
못다 한 사랑의 안타까움 때문이요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남은 미련 때문이요
많은 친구를 만나려 하는 사람은
정 줄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혼자만 있으려 하고
가슴이 아픈지 조차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원태연 시집 中





오직 사랑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으로 치장된 다른 것에 한눈팔지 말게 하소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외려 그대에게
힘겨운 짐이 되지 말게 하소서


- 이정하 ‘너는 눈부시지만… 中



책장을 넘기다가 오래전 친구가 선물해 준 시집이 눈에 띄더라.
바로 앞에 적어준 원태연 시집, 아마 한두 번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등학교 때 꽤 인기를 누렸던 시집이지. 아마 너두 알겠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 좋고, 가슴에 팍팍 와닿는 듯한 시 구절들이 그 당시 내 맘을 설레게 했던…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 들여다봐도 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그런 시집인 거 같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별할 때 느끼는 감정들을 시적인 함축된 말들로 표현하지 않아 쉽게 공감할 수 있잖아. 시집 제목 생각나?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지, 그래서 시인인가 봐.

… …

이제 곧 가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결혼 소식이 들리네.
작년에 마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거든, 내가 얘기했었나?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한 아르바이트를 간단히 말하자면 기존의 프로그램을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는데 그 기존의 자료를 새 프로그램에 옮기는 작업, 그걸 내가 했어. 컴 관련 회사였거든. 암튼 거기서 아르바이트할 때 스물일곱 먹은 언니하구 또 동갑내기인 경태 씨라는 사람이 있었거든 내가 보기엔 그 경태 씨는 눈이 높아서 그 언니 쳐다도 안 보는 거 같았어. 물론 그 언니는 내가 보기에두 경태 씨 무지 좋아하는 거 같더라. 나랑 경태 씨랑 둘이서만 밥 먹으러 가면(경태 씨도 나두 피자 좋아해서 둘이 자주 피자 먹으러 갔었거든) 괜히 나하구 말두 안 하고 그래서 내가 눈치를 챘었지.

근데, 근 몇 달 동안 소식을 모르고 살았는데 글쎄 둘이 결혼한다지 뭐야. 참, 아까운 남자하나 놓쳤다. 킁~ 10월에 결혼한다구 청첩장이 왔더라구. 언니 나이가 많아서 친구들은 벌써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야외촬영 때 같이 가줄 친구가 없다고 올 수 있으면 와 달라고 하더라고, 배 아픈 데 갈까 말까?

그래서 결혼은 일찍 하는 게 좋대. 일찍 해야 친구도 많이 오고 좋다고, 늦게 하면 다른 친구들 다 결혼하고 그러면 가고 싶어두 갈 수 없을 경우가 많잖어. 그래서 결론은 일찍 하던가 아예 안 하던가. 그래야겠군…

곧 있으면 자대배치받겠네. 궁금하지? 어디로 가게 될지.
먼 곳으로 가라고 주문을 외워야지… 잔소리 듣기 싫으니깐. 그전에 얘기했었지만 제주도쯤으로 떨어지면 좋잖아. 일부러 여행두 다니는데 그럴 필요 없을 테고, 아니면 섬이나 홍도나 매물도나 그런 곳은 해군이 지키나? 헷갈리네, 오늘은 편지 쓰면서 무지 많이 헷갈리네 머릿속이 뒤죽박죽. 후한이 두려워서 안 되겠다. 이왕이면 가까운 데로 떨어져라. 맘대로 되는 거 아니겠지만은. 정말야 근무하기 편하고 웬만하면 설서 가까운 데루 안 그러면 4개월 더 긴 공군 억울하잖어.


1998. 8. 30.


P. S.
날이 선선한 거 같아. 무료하지 말라구
껌 보낸다. 동기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나눠 먹어.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구. 거봐. 시간 빠르지?
벌써 1주일 지났잖어.



두 사람 모두 지인인 커플의 결혼식이 부러운 모양이다.

입대 전 고수부지 데이트 중 건너편 마포의 한 빌딩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알게 된 커플이 결혼하게 된 것 같다. 말로는 독신주의니 뭐니 해도, 꽃다운 나이의 젊은 여성이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알콩달콩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이전 편지에서 보내주겠다던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합당 기사도 어김없이 동봉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기사 내용도 묘하게 정당과 정당의 결합이다. ‘야대’서 ‘여대’로 정계지진

한 남녀의 결합이 정국의 주도권을 좌우할 국가적 중대사는 아니지만 개인의 인생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결혼은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또 다른 별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도 하나의 별을 낳았다.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일 뿐 아니라 내가 생각지 못한 내가 겪지 못한 세계를 접하게 해 준다. 그것은 또 아빠로서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나를 후숙 되게도 해 주었다. 물론 아내와 나의 익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경이롭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감동적이었던 내 삶의 일부는 바로 쭈니라는 새 세상과의 조우이다.


전대미문의 흑수저, 자조 섞인 자칭으로 내가 즐겨 쓰는 말이자 아내가 사용을 금지한 말이기도 하다.

이 표현에 딱 맞는 청년기를 보냈던 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너무도 가엾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진 기회는 삼포세대·오포세대라는, 전대미문의 흑수저보다 더 가슴 아픈 말들로 자칭·타칭 하게 되었다.


삼포에도 오포에도 결혼과 출산은 포함된다.

결혼을 했지만 맞벌이 등으로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들을 주변에서 어럽지 않게 본다. 결혼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그리고 그 어려움에 티끌만 한 도움도 줄 수 없는 나이기에 하라 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면 자녀를 꼭 낳아 길러보라는 말은 꼭 하고 싶다. 자녀를 양육함에 필요한 노력과 비용 또한 대단함을 모르지 않으며 그 어려움에 역시 티끌만 한 도움도 줄 수 없는 나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가장 경이롭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감독적인 삶의 일부를 모르고 생을 마치는 게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이런 나도 정작 깜찍이 소다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준 것은 이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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