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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Nov 06. 2024

은사시나무


삼철이에게


올해는 가을이 짧고 겨울이 길데. 라니냔가 뭐시깽인가의 영향으로 11월 중순께부터 영하권으로 떨어진대. 난 … 추운 거 정말 싫은데… 올 겨울도 여전히 옆구리는 허전할 테고… 잉~. 난 더운 거는 웬만큼 참을 수 있는데 추위는 진짜 못 참아. 겨울 되면 목도리로 둘둘 휘감고 다니고 속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그래도 가슴이 펴지질 않아 항상 움츠리고 다니는데 그래서 더 추운가 봐. 벌써부터 겨울이 두려워져. 너도 그렇겠구나. 쫄따구로 겨울나기 힘들다던데, 일병두 아닌 이등병. 히히~ 잘됐다. 내가 원래 남 잘되는 꼴은 배 아파서 못 보는데… 실컷 놀려줘야지.

며칠 동안 우울하던 마음이 오늘에서야 좀 풀렸어. 왜냐구?
친구들 만나서 열심히 수다 떨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거의 뒤집어 놓고 왔지. 꽤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신곡은 아는 게 별루 없었지만. 것두 노래두 잘 못하는 내가 죽자고 마이크 놓지 않았다. 젤 먼저 엄정화의 ‘Posion’을 불렀지. 애들은 옆에서 춤추고 난 노래하고 춤추느라 바뻤다. 그리고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 거의 맛 갈 정도로 불렀다. 것 때문에 올라가지도 않는 노래 불르니라 괜한 목청만 터지게 소리만 꽥꽥 질러댔다. 그래두 재미있었어. 내가 친구들 앞에서 아니면 언제 그렇게 주름잡고 놀아 보겠어. 남들 앞에서 그렇게 놀면 푼수 떤다고 할 거 아냐.

방금 라디오에서 나온 얘긴데, 넌 지금을 뭐라고 생각하니?
1. 늦여름   2. 초가을… 생각해 봐. 너한테는 어떤 말이 먼저 떠오르는지, 늦여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이 강한 사람. 반대로 초가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취적인 사람… 난 늦여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봐두 난 너무 과거에 집착을 하는 거 같아. 근데 누구나 지나간 일이 그리운 법 아니니? 아쉽고, 잊혀지지 않는 게, 너두 그렇지?

항상 너한테 편지를 쓰기 전에 쓸 말이 무척 많이 생각됐는데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정리도 잘 안되고 글과 글 사이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도 않는 게 내가 봐도 참 싫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어떤 식으로 옮겨 적어야 할까 하는 생각만 들고. 그러다 보면 정작 딴 얘기만 쓰게 되고. 넌 몰랐지,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지…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이만 쓸래.
그럼 잘 자. 나두 잘 잘께. 안녕


1998. 9. 1.
a. m. 12:45


P. S.  내가 월급 탔었어서 너한테 맛있는 거 사줄려고 했는데 얻어만 먹었잖아. 돈 벌었으면 한턱내야 하는 건데… 말야. 그래서 얼마 되진 않지만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군인들 매점(BX라고 했니?)은 싸다던데. 이 정도 가지면 한번 먹을 수 있을 테지? 그럼 담에 또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또 보내줄께…
그리고 복권은, 복권의 의미가 행운이잖아.
그래서… 너 자대배치받는데 행운이 있으라고…
동전은 있지? 혹 복권에 당첨은 안 돼도 행운은 있을 거야. 당첨되면 지급기한이 10월 이후니까 특박 나와서 타가면 되잖어. 어쩜 이게 마지막 편지 일지도 모르는데, 자대 받기 전에. 내가 신경 써준 거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자대 가면 형한테 주소 알려줘. 기다리구 있을께…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내에게는 고등학교 동창인 세명의 단짝 친구가 있다.

내가 제대한 이후 단짝 하나가 늘었고 비교적 최근에 또 하나가 늘었다.

최근에 단짝이 된 한 친구를 제외한 5총사 덕분에 코로나가 기승이던 해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 남편, 아이들까지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한다.

늦게 결혼 한 원년멤버가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베트남으로 이주한 이후 부부의 조국방문이 만남의 시기로 자연스럽게 변모하긴 했으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그녀들의 우정은 변함없이 오랜 시간 보기 좋게 유지되고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그녀와 세명의 친구들이 노래방에 갔을 것이다.

세 사람은 모두 한 노래할 뿐 아니라 아내보다 훨씬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들이다. 노래방에 가면 이들 간의 마이크 쟁탈전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우울한 친구의 기분 전환을 위해 너그러이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가 주로 마이크를 잡았다고 하니 이들의 우정이 실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열창의 욕망을 억제하며 넷 중 노래를 가장 못하는 아내의 절창을 내내 들었으니 말이다.


길거리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는 천진난만, 순진무구했던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6인의 그녀들 중에는 배우자가 은퇴한 친구도 있고 자녀가 대학원생인 친구도 있다. 시간은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어김없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그것은 친구들이었다. 오래도록 그녀가 나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은사시나무가 되어 주고 때로는 간이역이 되어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으리라.


아내의 친구들이 감사하다.

편지봉투 속에 현금을 넣어 보내고 복권으로 행운을 빌어주었던 아내가 고맙다. 어느 하나 나로 인한 것이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지는 슬픔을 스스로 치유하는 그녀의 모습도 대견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은사시나무가 되어 주었던 아내 정작 나에 기댈 수 없었던

미안함이 가장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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