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이에게
올해는 가을이 짧고 겨울이 길데. 라니냔가 뭐시깽인가의 영향으로 11월 중순께부터 영하권으로 떨어진대. 난 … 추운 거 정말 싫은데… 올 겨울도 여전히 옆구리는 허전할 테고… 잉~. 난 더운 거는 웬만큼 참을 수 있는데 추위는 진짜 못 참아. 겨울 되면 목도리로 둘둘 휘감고 다니고 속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그래도 가슴이 펴지질 않아 항상 움츠리고 다니는데 그래서 더 추운가 봐. 벌써부터 겨울이 두려워져. 너도 그렇겠구나. 쫄따구로 겨울나기 힘들다던데, 일병두 아닌 이등병. 히히~ 잘됐다. 내가 원래 남 잘되는 꼴은 배 아파서 못 보는데… 실컷 놀려줘야지.
며칠 동안 우울하던 마음이 오늘에서야 좀 풀렸어. 왜냐구?
친구들 만나서 열심히 수다 떨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거의 뒤집어 놓고 왔지. 꽤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신곡은 아는 게 별루 없었지만. 것두 노래두 잘 못하는 내가 죽자고 마이크 놓지 않았다. 젤 먼저 엄정화의 ‘Posion’을 불렀지. 애들은 옆에서 춤추고 난 노래하고 춤추느라 바뻤다. 그리고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 거의 맛 갈 정도로 불렀다. 것 때문에 올라가지도 않는 노래 불르니라 괜한 목청만 터지게 소리만 꽥꽥 질러댔다. 그래두 재미있었어. 내가 친구들 앞에서 아니면 언제 그렇게 주름잡고 놀아 보겠어. 남들 앞에서 그렇게 놀면 푼수 떤다고 할 거 아냐.
방금 라디오에서 나온 얘긴데, 넌 지금을 뭐라고 생각하니?
1. 늦여름 2. 초가을… 생각해 봐. 너한테는 어떤 말이 먼저 떠오르는지, 늦여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이 강한 사람. 반대로 초가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취적인 사람… 난 늦여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봐두 난 너무 과거에 집착을 하는 거 같아. 근데 누구나 지나간 일이 그리운 법 아니니? 아쉽고, 잊혀지지 않는 게, 너두 그렇지?
항상 너한테 편지를 쓰기 전에 쓸 말이 무척 많이 생각됐는데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정리도 잘 안되고 글과 글 사이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도 않는 게 내가 봐도 참 싫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어떤 식으로 옮겨 적어야 할까 하는 생각만 들고. 그러다 보면 정작 딴 얘기만 쓰게 되고. 넌 몰랐지,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지…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이만 쓸래.
그럼 잘 자. 나두 잘 잘께. 안녕
1998. 9. 1.
a. m. 12:45
P. S. 내가 월급 탔었어서 너한테 맛있는 거 사줄려고 했는데 얻어만 먹었잖아. 돈 벌었으면 한턱내야 하는 건데… 말야. 그래서 얼마 되진 않지만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군인들 매점(BX라고 했니?)은 싸다던데. 이 정도 가지면 한번 먹을 수 있을 테지? 그럼 담에 또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또 보내줄께…
그리고 복권은, 복권의 의미가 행운이잖아.
그래서… 너 자대배치받는데 행운이 있으라고…
동전은 있지? 혹 복권에 당첨은 안 돼도 행운은 있을 거야. 당첨되면 지급기한이 10월 이후니까 특박 나와서 타가면 되잖어. 어쩜 이게 마지막 편지 일지도 모르는데, 자대 받기 전에. 내가 신경 써준 거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자대 가면 형한테 주소 알려줘. 기다리구 있을께…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