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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Nov 10. 2024

가을인가 봐


가을인가 봐. 벌써…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느껴지는 바람이 꽤 서늘하거든. 찬 바람이 부니까 왠지 마음이 심란하다. 남자는 가을을 탄다던데. 난 남자두 아닌데 왜 이러지? 마음도 그렇고 해서 오랜만에 원두커피를 내려 먹었어. 너 혹시 생각나니? 신촌 예다원에서 먹었던 커피. 헤이즐넛. 커피 향 좋지. 그거 내려 먹었거든. 집안에 온통 커피 향이 퍼져서 기분이 참 좋았어. 내가 젤 좋아하는 커피거든. 향이 좋아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맨날 아줌마 커피(일명 다방커피)만 먹다가 오랜만에 원두커피를 먹어서 그런지 머그잔으로 가득 두 잔이나 마셨어.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에 가서 지금 보는 책 세 권을 빌려와서 읽다가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TV를 좀 보고 샤워를 하고 하루일과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났어. 편지를 쓴 지 꽤 오래되었구나. 하고.

오늘이 벌써 토요일인데 넌 자대 받아 갔겠지?
네가 어느 곳으로 배치를 받았는지 난 지금 알 수 없지만, 이 편지가 네 손으로 가는 날이면 아마 알고 있겠다. 궁금해 어디로 가게 되었는지. 혹 호출이라도 할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그만큼 행운을 빌어 주었으니깐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 생각하고, 나중에 주소 받으면 그때 또 얘기하지 뭐


... 영화얘기, 브래드피트 잘생겼다는 얘기 / 영화에서 브래드피트 잘 생겼다는 얘기...


나 요즘 뭐 하고 지냈나 궁금하지? 아님 말구… 여름이 지나서 그런지 몇 군데서 면접을 본다길래 두어 군데 이력서를 내놨어. 근데 막상 이 일을 그만두고 나면 섭섭할 거 같애. 나한테야 이보다 더 편한 곳이 어디있다구. 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일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구 그냥 웬만큼의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니깐… 그래두 어차피 오래 몸담을 수 없으니깐 어차피 알아보긴 하지만 말야. 그리구 뭘 해볼까 생각 중이야.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든 건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긴 첨이야. 얼마를 갈런지는 모르지만. 이번엔 뭘 배워볼까. 우습다. 이런 말하는 게.(뭘 배워본적두 별루 없으면서 말야) 백화점 문화센터에 좋은 강의가 있을까 싶었는데 것두 아니더라. 좋은 것은 거의 오전이나 오후 시간 밖에 없구 저녁엔 없으니 말야. 이러다 또 흐지부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러기 전에 얼른 찾아봐야지.

음… 그리구 별일 없었다. 맞아, 소설책을 읽고 있어.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를 다 읽어 2권을 보려 했지만 대출이 되어있는 바람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듯한 제목을 골라서 읽고 있는 중이야. ‘어디에도 없는 그대’ 3권을 읽고 있어. 4권짜리 거든… 내용이 얽히고설켜 좀 답답하고 복잡스럽긴 하지만 읽을만해. 소설이야 다 그렇고 그렇지 뭐 너한테 편지를 다 쓰고 또 읽을 참이야. 오늘 낮에 빌려와서 벌써 절반이나 읽었어. 집에 있기도 무료하고. 뚜렷한 약속도 없고 해서.
오랜만에 편질 쓸려니 입에서만 맴돌고 두서가 없는 글이 되었네. 담에는 좀 더 신경 써서 편지 쓸께, 네 형이나 너한테서 연락오기만을 기다리며… 언젠가는 부치겠지 뭐.

보고 싶은 우리 철이. 군생활 열심히 해!
은경이두 열심히 살고 있을께…


1998. 9. 5+1.
a. m. 2시 십오분에


메뉴에 헤이즐넛 커피 있다면 나도 즐기곤 한다.

하지만 그녀가 헤이즐넛 커피를 가장 좋아했다는 것, 삶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는 것은 잊고 지냈다.

시간은 이렇게 많은 것을 망각하게 한다.


아내의 편지에 이어 나의 기억이나 소회를 적는 연재의 형식이기에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또 모든 편지 글들을 소개할 수는 없으니 선택 필수이다.


은경이두 열심히 살고 있을께…


추신의 마지막 한 줄로 도로 접어 넣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내는 참 열심히 살아왔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뭘 해보고 무언가를 계속 배워서 그녀는 자격증도 많다. 제빵·제과·한식 조리사, 보육 교사, 평생 교육사 등등 10여 개로, 꼴랑 석사학위 하나와 운전면허증 외엔 비슷한 것도 없는 나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가정을 이룰 당시의 경제적 기여도 아내가 더 컸다. 내가 없는 동안 열심이었고 함께 했던 시간과 부부인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오래 다니던 직장에는 쭈니의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출근을 했고 육아를 위해 퇴사한 지 얼마지 않아 다시 작은 회사에 취업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에 아이를 돌보고 편찮으신 장모님과 처가도 살피며, 가끔 좌담회나 유사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직장생활이 더럽고 치사해 때려치우겠다는 내게 '저녁에 자신이 설거지라도 더 할 테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라고 했던 아내이다.


얼마 전에는 모 보험회사에서 진행하는 설명회 참석 후 LA갈비를 받아왔다. 

아내 덕분에 주말 점심 세 식구가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쭈니가 참 맛있게도 잘 먹었다. 가족이 함께하는 주말의 식사는 언제나 즐겁지만 이날은 내가 더 노력했다. 빠가 망가져야 가족이 즐거운 법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데도 아내를 향한 미안함은 잘 지워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동글동글 밤 같은 아내 도토리처럼 좀 더 길쭉한 얼굴의 나, 이 둘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헤이즐넛 닮은 아들 이렇게 밝은 우리일 때면 난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은경이랑 쭈니가 있어 내가 산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들지만,

 속에 묻힌 줄기와 뼈가 화석이 되듯이 

진실하고 굳은 마음은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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