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 가득 단맛과 시원함의 간식
우리 집은 방앗간 집으로 불렸다. 물레방아가 있는 방앗간은 벼를 하얀 쌀로 바꿔주는 마법의 기계가 있었고, 설날이 다가오면 가래떡을 뽑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면 “수꾸레(숲골) 방앗간 집 아들”이라고 설명하면 금방 알아보신다. 숲골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작로(新作路)에 붙어 있는 동네였고, 어릴 적에는 주막, 이발관, 구멍가게 그리고 우리 집 방앗간이 있었다.
옛날 방앗간 집이라고 하면 부자라고들 했지만, 울 엄마 아버지가 운영하실 때는 다른 집과 지분을 나눠 운영하는 동업이라 한 해가 마무리되면 이익을 나누었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직접 맡아 방앗간을 돌리니 상황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방앗간이 주된 일이라 농사는 밭농사만 조금 지었다. 마을에서는 벼농사가 주였고, 드문드문 여름 배추와 김장배추를 재배하는 분들이 있었다. 당시 농사에서 중요한 건 거름과 비료였다. 내 기억엔 집집이 비료 푸대(포대기) 몇 장은 꼭 있었다. 이 보잘것없던 비료 푸대가 여름에 ‘아이스께끼(아이스바)’ 장사꾼이나 엿장수가 나타나면 진가를 발휘한다. 비료 푸대와 아이스바나 엿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언제든 간식거리를 살 수 있지만, 그때는 계절이라는 문턱이 높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산골 동네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이스께끼 장사와 엿장수가 나타나는 날이면 아이들이 먼저 알아챘다. 가위질 소리, 얼음통 뚜껑이 열릴 때 피어오르던 하얀 냉기,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던 그 쨍한 단맛. 그날의 여름은 언제나 조금 더 시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리어카와 엿가위 소리는 우리 동네에 허락된 유일한 ‘달콤한 접근성’이었다. 읍내까지 나갈 수 없던 아이들을 위해, 그 투박한 바퀴는 고개를 넘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기어이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왔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트럭’이 생필품을 싣고 오는 생존의 문제였다면, 그보다 앞서 찾아왔던 이 ‘리어카’는 아이들에게 일상의 지루함을 깨뜨리는 축제와도 같았다. 비료 푸대를 들고 뛰어가던 그 숨 가쁜 설렘이,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저 멀리서 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먼저 달려가던 그 순간 말이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돌봄이나 복지의 접근성도 이랬으면 좋겠다. 단순히 쌀 포대를 전달하고 가는 의무적인 방문이 아니라, 저 멀리서 소리만 들려도 “아이고, 왔는가!” 하고 버선발로 마중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반가움이었으면 한다.
비료 푸대 하나에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던 그 시절의 마음처럼, 트럭보다 느리고, 리어카보다 투박하더라도 누군가를 웃게 하는 ‘단맛’을 싣고 온다면, 그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유독 그 시절 아이스께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