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을 곳, 막을 곳
“낡은 문을 열어 눅눅한 공기를 밀어내고 새 바람을 들이는 일, 바닥을 쓸고 걸레질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일. 어린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환경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내가 내 삶의 환경을 결정한다’는 당연한 명제가, 나이 듦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그때는 몰랐다.
사람만 나이 드는 게 아니라 집도 나이가 든다. 기둥은 휘고, 문틈은 벌어지고, 벽에는 실금이 간다. 젊을 때는 그 틈을 메우고 고칠 힘이 있었지만, 기력도 자신감도 희미해진 노년의 집주인은 점점 집의 노화를 방치하게 된다. 집을 고치거나 옮기는 선택 앞에서 어르신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이고, 돈 들여서 뭐 해. 이제 내가 얼마나 산다고.”
이 말은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 ‘고치고 싶은 의지’가 먼저 꺼지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렇게 어르신의 집은 거주자의 체념과 함께 늙어간다.
최근 복지 현장에서는 어르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낙상’을 예방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다. 화장실에 미끄럼 방지 타일을 깔기도 하고, 벽마다 ‘안전 손잡이’를 설치해 드린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뼈가 약한 어르신에게 낙상은 회복이 더딜 뿐 아니라, 때로는 남은 생을 누워 지내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을 돌다 보면 참 아이러니한 풍경을 마주한다. 낙상을 막아줄 손잡이는 벽에 튼튼하게 박혀 있는데, 정작 그 손잡이를 잡아야 할 어르신의 손은 꽁꽁 얼어 있는 경우다.
오래된 시골집의 가장 큰 적은 ‘외풍’이다. 문틀과 창틀이 낡아 덜컹거리고, 벽을 뚫고 들어온 냉기가 바닥의 온기를 금세 식혀버린다. 어르신들은 난방비를 아끼려고 보일러를 끄고 전기장판 위에서만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손잡이가 있어 몸을 지탱할 수는 있지만, 파고드는 추위는 어르신의 뼈마디를 쑤시게 하고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만든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비닐 막’이다. 근본적인 단열 시공을 하기엔 예산도, 집의 구조도 마땅치 않으니, 마루 앞이나 창문에 두꺼운 비닐을 덧대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막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다. 춥고 처량한 소리인데, 이상하게도 이 집에 ‘사람이 다녀갔다’는 인기척처럼 들릴 때가 있다. 임시방편일지언정, 그 투명한 비닐 막 하나가 한겨울의 칼바람을 막아주어 어르신의 체온을 지켜낸다.
여기서 나는 ‘주거 접근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넘어지지 않는 곳(Safety)’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몸을 녹일 수 있는 곳(Comfort)’이어야 한다. 낙상을 막는 ‘손잡이’가 어르신의 하체를 지탱해 준다면, 외풍을 막는 ‘단열’은 어르신의 생기를 지탱한다.
우리의 주거 복지 계획은 낙상 예방이라는 ‘안전’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제는 그만큼 ‘에너지 효율’과 ‘보온’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낡은 집의 문틈을 메우고, 단열 벽지를 바르고, 창호를 교체하는 일. 그것은 단순히 집을 고치는 공사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산다고”라며 삶을 놓아버리려는 어르신의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데우는 일이다.
사람이 늙어가듯 집도 늙어간다. 낡은 집에도 지팡이 같은 ‘손잡이’가 필요하고, 낡은 옷을 기워 입듯 ‘외풍’을 막아줄 솜옷이 필요하다. 어르신이 잡고 일어설 수 있는 튼튼한 손잡이 옆에 훈훈한 온기까지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어르신의 보금자리에 해드려야 할 진짜 ‘집단속’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