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마음의 문턱,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관계의 접근성을 가로막는 ‘이심전심’

by 먼소리뚜버기

10리 길을 걷는 것보다, 100원 택시를 부르는 것보다 더 넘기 힘든 고개가 있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개다. 물리적인 길은 포장하면 되지만, 마음의 길은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잡초가 자란다.

어느 날이었다. 어르신이 말했다.

“아이고, 바쁜데 뭐 하러 왔어. 얼른 가.”

나는 문턱 앞에서 잠깐 멈칫했다. 정말 가라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서로가 편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르신은 ‘미안함’ 때문에 더 밀어내고, 나는 ‘예의’라는 이름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난다. 그래서 그사이에 해야 할 말들이 조용히 놓친다.


현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에게는 공통된 정서가 하나 있다. ‘침묵의 미덕’이다. “얼른 가”는 거절이라기보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고맙지만 미안하다.”는 반어일 때가 많다. 예전에는 그런 방식이 통했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던 시절, 눈빛만 봐도 속내를 짐작하며 살던 ‘이심전심’의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요즘은 말이 적을수록 오해가 커진다. 젊은 복지사나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의 “괜찮다,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물러서면, 어르신은 그 뒷모습을 보며 서운해하기도 한다.

“어떻게 빈말이라도 한 번 더 권하지를 않아? 사람이 정이 없어.”

여기서 관계의 길이 끊어질 수 있다. 살아온 시대가 다른 두 사람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이다. 어르신은 “내 마음 같겠지”, “척하면 착이지”라는 기대 속에서 상대가 내 속을 알아주길 기다린다. 반면 상대방은 확인된 말만 믿고 움직이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 틈에서 어르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까다롭고 말 안 통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표현의 장벽’이라고 부르고 싶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계단을 없애고 경사로를 놓듯이, 말이 서툰 분들에게는 대화의 경사로가 필요하다. 어르신들이 섭섭해하는 건 ‘지원을 못 받아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반찬이 짜면 “이건 좀 짜네요”라고 말하면 되는데, 어르신은 “입맛이 없어서 그만 먹으려고”라고 하신다. 그러면 전달하는 사람은 난처해진다. 체크표에는 ‘거부’라고 적어야 할 것 같고, 메모에는 ‘식사 원치 않음’ 같은 말이 남는다. 그 메모가 그대로 다음 사람 손에 넘어가면, 다음 주엔 반찬이 조금 줄거나 방문이 더 빨리 끝나기도 한다. 어르신은 속으로 또 섭섭해한다.

“내가 싫다고 한 게 아닌데….”

말은 한 번 엇갈리고, 마음은 두 번 멀어진다.


“우리 며느리는 내가 아파도 전화 한 통 없어.” 하소연을 듣다 보면 더 안타까운 속사정이 보이기도 한다. 정작 어르신은 자식에게 전화해서 “아프니까 병원 좀 데려가 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바쁜데 일 봐라” 하고 끊으셨을 가능성이 크다. 자식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피는 통한다는 믿음, 내 마음이 상대에게도 통할 것이라는 기대. 아름답지만,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때로 ‘불통의 벽’이 될 수 있다.

말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 진정한 관계의 접근성을 높이려면 두 가지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는 듣는 우리가 어르신 말의 겉과 속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보는 것, 다른 하나는 어르신들에게도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조심스럽게 권해 드리는 것이다.

“자식들이 내 맘 몰라준다며 서운해 마시고, ‘보고 싶으니 밥 한 끼 먹자’고 먼저 말씀해 보세요.”

“반찬이 짜면, 짜다고 말씀하셔야 다음엔 안짜게 하지요.”


접근성은 용기의 문제다. 들어주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는 용기, 말하는 사람은 침묵을 깨고 속내를 내어 보이는 용기. 100원 택시가 대문 앞까지 닿았듯, 이제는 우리의 대화도 서로의 방문을 열고 마음 깊은 방까지 닿아야 할 때다.

“말 안 해도 알지?” 대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이 오가는 관계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연결해야 할 가장 따뜻한 도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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