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의 문이 활짝 열리면
말의 문턱을 넘는 데도 손이 필요하듯, 문화의 문턱을 넘는 데도 누군가의 “좌로, 우로”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우리 가족은 설천면 양지마을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셋방살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도 없었다. 주인집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기는 했지만, 어린아이였던 나는 ‘눈치’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더라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셋방살이 집은 네 군데 정도다.
그중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은 곳은 이발관과 전파사, 그리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가게가 있는 집이다. 도로 쪽의 가게 외에도 안쪽에도 주인집과 셋방이 2개 정도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집 안쪽에는 마당이 있었고, 가게 위에는 옥상이 있었다. 당시에는 번화가였다.
아버지는 숲골 마을로 이사 가기 전까지 양지말(양지마을)에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고치거나 용접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동네 아저씨들은 나를 보고 빵꾸쟁이(자전거나 오토바이 고무 튜브의 구멍을 때우는 사람) 아들이라고 놀렸다. 어른들의 놀림에 격한 반응을 보였던 내 모습도 기억난다.
날이 풀리면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주인집 마당으로 몰려든다. 사람들이 모이면 주인집 방에서 다리가 달린 나무 상자를 마루로 내온다. 그리고 드르륵 소리와 함께 나무 상자의 문이 활짝 열리면 흑백 브라운관이 볼록한 배를 내밀고 있다. 전원이 들어오면 마치 영화관에 모여든 사람처럼 모두가 브라운관 속으로 들어갈 듯이 집중한다. 드라마, 권투, 그리고 작고하신 ‘박치기왕 김일’의 프로레슬링 등 방송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이웃이었다.
주인집 아들은 안테나를 조정했다. “좌로 돌려, 우로 돌려”라는 말에 맞춰 미세하게 안테나 지지대의 방향을 바꾼다. 이래저래 해보고 가장 깨끗한 화면이 나오면 멈춘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옆집 아줌마도 있었고, 권투나 레슬링에 심취해 감독처럼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아저씨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지말 사람들에게 주인집 마당은 유일한 극장이었고, 문화접근성의 최전선이었다. 라디오만 듣다가 드디어 움직이는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손안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를 끊임없이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시절, 주인집 마당은 단순한 TV 시청 장소가 아니었다. 고단한 농사일과 살림살이에 지친 이웃들이 함께 웃고 울며,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음의 해방구’였다. 화면이 지지직거려도, 자리가 비좁아 쪼그려 앉아도 그곳엔 사람의 온기가 있었고 ‘함께 본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스마트폰’이라는 내 손안의 극장이 생겼고, 읍내에는 번듯한 ‘작은 영화관’도 들어섰다. 물리적인 환경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그 마당을 채웠던 어르신들은 지금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손안의 기계는 너무 복잡해졌고, 읍내 극장의 매표소는 사람이 아닌 기계(키오스크)가 지키고 있다. 옛날 주인집 아들이 “좌로, 우로” 소리에 맞춰 안테나를 잡아주었듯, 지금 어르신들에게도 그 복잡한 기계 앞을 안내해 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뒤에 선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예매를 포기하고 돌아서거나, “내 나이에 무슨 영화냐”라며 스스로 문턱을 높인다.
문화접근성은 단순히 건물을 짓고 기계를 들여놓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초대’의 문제다. 주인집 아저씨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다들 모이시오!”라고 자리를 내어주었던 그 마음, 그 따뜻한 환대가 지금 시대의 시스템 속에도 녹아 있어야 한다.
키오스크 옆에 잠깐 멈춰 서서 “제가 눌러드릴까요?”라고 말해 주는 사람, 어르신이 보기 편한 큰 자막, 그리고 “같이 가요” 하고 손을 내미는 동네의 약속. 그런 것들이 현시대의 ‘안테나 조정’일 것이다. 화면이 지지직거려도 자리를 비켜 앉으며 끝까지 보던 그 시절처럼, 지금의 문턱도 누군가가 조금만 낮춰주면 된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가끔은 남들 웃을 때 같이 웃고, 울 때 같이 울어야 살맛이 난다. 우리 곁의 어르신들이 방 안의 TV 앞에서만 머물지 않고, 다시 한번 세상이라는 광장으로 나오셨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읍내 극장에 나들이를 가는 모습, 팝콘을 처음 드시며 아이처럼 신기해하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나는 50년 전 양지마을 마당에서 눈을 반짝이던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브라운관의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던 그날의 설렘처럼, 어르신들을 향한 문화의 문도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년이 ‘여생(餘生)’을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향유(享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