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 17일차 20240602(일) 몬테풀치아노 - 베로나
* 유럽여행 17일차 20240602(일) 몬테풀치아노 - 베로나
* 아레나(Arena)는 라틴어로 '모래'라는 뜻으로 격투기장에 모래를 깔고 검투사나 맹수의 피로 더러워지면 모래를 그 위에 끼얹으면서 경기를 진행했다고 한다.
* 3테너즈 콘서트는 세계 3대 테너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함께한 공연으로 1994년에 미국 LA 다저스타디움을 시작으로 2001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여 서울에서도 공연하였다.
몬테풀치아노 아침 산책의 상념
조용한 중세도시의 이른 아침, 사람 한 명 없는 몬테풀치아노 거리를 나 혼자 거닐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너무도 평온하고 운치 있는 거리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당 맞은편 광장 우물을 지나게 되었다. 메디치가 문양이 세워진 우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메디치가 문양은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고 서 있던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자꾸 연상시켰다.
'화려한 피렌체 예술의 부흥 뒤에는 메디치가에 복속되었던 토스카나 지방의 많은 도시들의 희생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제 본 시에나 궁전과 오늘 몬테풀치아노 광장에서 이들 도시가 메디치가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시간이 멈춘 중세 도시로 남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피렌체의 화려한 꽃이 이들 도시의 밑거름 위에 피어났구나!' 하는 생각에 맘이 무거워졌다.
기수를 돌려 베로냐로
토스카나 지방을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해결하지 못한 미션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스위스에서의 일정을 넉넉하게 하기 위해 일찍 스위스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만에 스위스로 넘어가는 건 무리여서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한 도시를 거쳐 가기로 했다. 볼로냐, 베르가모, 페라리 등이 후보에 올랐는데 베로나를 최종 낙점했다. 베로나를 선택한 이유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장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1세기경에 지어진 아레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다 보니 아무래도 건축물에 관심이 많이 갔다)
기수를 돌려 북으로 향했다. 피렌체를 지나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볼로냐를 지나서 3시간 40분을 달려야 하는 여정이었다. 볼로냐를 뒤로 한 차는 도로 양측으로 푸른 들판이 펼쳐진 평야 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끝이 보이지 않았고 도로 위에는 오가는 차도 거의 없었다. 파란 하늘과 드넓은 푸른 들판을, 바람을 맞으며 혼자서 달리자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탄성을 나도 모르게 지르게 되었다.
"규완아, 잘~했다, 잘했어~! 오길 잘했어."
핸들을 붙잡고 연신 소리를 질렀다. 막힌 뭔가가 뚫린 듯 터져 나오는 갑작스러운 환호성에 나 자신조차 사뭇 놀랐다. 여행 온 긴 시간 동안 긴장 속에 지내서였을까? 후련해진 가슴에 이제야 진정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폭우에 젖은 아레나
베로나 숙소 역시 버스로 시내를 접근할 수 있는 근교에 잡았다. 방에 짐을 부리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가랑비는 금세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하더니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알프스산맥 자락에 위치한 탓인지 기상이 변덕스러운 것 같았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몬테풀치아노 아파트에서 지어 온 밥에 순* 고추장을 비벼서 아껴왔던 김을 한 봉지 꺼내 맛있게 싸 먹었다.
오후 5시가 넘자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우산을 챙겨 나와 구글 지도가 안내하는 데로 아레나로 가는 버스를 탓다. 창밖으로 보이는 베로나 시내 거리는 상상했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기자기한 소도시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도시로 넓은 도로를 따라 4~5층 건물들이 빼꼭히 이어져 있었다. 현대식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다양한 오래된 건물들이 단정하고 이국적인 인상을 주었다.
버스는 시청 건너편 높고 긴 성벽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시청 앞 공원을 지나 비에 젖은 아레나로 향했다. 아레나는 2천 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흐트러짐 없는 굵은 기둥과 아치 골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타원형의 구조가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인 라인들이 아직도 살아있어 구조적 건재함을 말해주었다. 아레나 가까이 가니 그 기하학적 라인은 중후하고 우아한 곡선으로 다가왔다. 빗물에 씻긴 백색과 당근색 석재들의 대비는 비에 젖은 거리의 차분함 속에서 아레나의 예술미를 더욱 짙게 했다.
6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아레나 입장이 가능했다. 모든 아치의 천장이 밖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져서 중앙의 원형 그라운드로 이어지고 중간에 2개의 통로가 원형으로 아레나를 두르고 있는 구조였다. 경사진 아치 천장 위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계단 스탠드(관중석)가 원형으로 감싸고 있었다. 모든 통로의 아치 천장은 벽돌로 빼꼭히 채워져 있어 아직도 균열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아치 구조는 고대 건축에 혁명적인 발견이었으리라. 오늘날 스타디움의 원형을 이미 1세기에 완성한 로마인들의 지혜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경의를 보낸다.
격투기장으로 지어졌던 아레나는 오늘날에는 대형 원형 공연장이나 경기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아레나는 공연이 예정되었다가 비로 인해 취소된 듯했다. 원형 그라운드 한쪽에는 공연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소품들과 장치들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중국풍 누각을 한 무대 배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의 '투란도트'가 틀림없었다.
투란도트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천상의 목소리'로 칭송받았던 고인이 된 이탈리아 출신 테너 파바로티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가 나의 클래식 최애곡이기에 반가웠다. 2001년 '3 테너즈 콘서트' 서울 공연 때 잠실주경기장 끝자락에서 관람했던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도 빈티지하고 고풍스런 이 곳 아레나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라이브로 들으며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천장 삼아 '나의 최애곡'을 다시 듣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P.S. 우연의 일치인지 이 아레나의 투란도트를 2024년 10월에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