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나세진 작가입니다. 오늘은 예전부터 꼭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곳을 포스팅하려 합니다.
저는 이 곳을 세 차례나 방문했습니다. 한 번은 우연히 걷다가 마주쳤고, 또 한 번은 부모님을 모시고 왔었고, 또 한 번은 앞서 두 번의 방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서였을까요? 마음 한 구석의 빈곳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과연 어디일까요? 두둥!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입니다. 아내와 4.19카페거리를 걷다가 쭉 위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흉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흉상을 지나면 작은 기념관이 나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방명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방명록 바로 앞, 벽에 선열들이 꿈꾼 나라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선열(先烈)이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돌아가신 분을 뜻합니다. 저는 특히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민족으로서 해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과 관련된 자료입니다. 사발통문과 최시형의 사진이 보입니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 않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나라의 돈만 없애는 일이 어찌 옳은 일이겠냐는 전봉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아주 오래 전, 6학년을 가르칠 때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면 독립운동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던졌습니다. 참고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에 놓이게 될지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6학년을 가르칠 때였습니다. 사회 시간에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자신이 만약 일제 시대에 태어나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손 들어 보세요."
처음에는 대부분 아이들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습니다. 제 기억에 거의 모든 학생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독립운동을 하면 어떤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될지를 뒤이어 말해주었습니다. 순간 아이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습니다. 감시의 대상이 되고, 그 독립운동가의 가족들 역시 위험해 집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딪고 독립운동을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들과 정반대의 삶은 사셨던 평민 의병들의 항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교과서에 실렸던 애국공채(독립공채) 사진을 기념관에서 마주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입니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망할 것이란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 지금은 잠시 나라를 빼앗겼을 뿐이란 마음으로 굴하지 않았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중학생 때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방학 숙제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억지로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요? 오로지 숙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내용만 파악하며 대충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김구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마음을 후벼 파는 명문장이 많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기념관과 상관 없는 여담이지만, 특히 부록으로 실린 '나의 소원'이란 글을 읽으면 가슴 한 구석에 파문이 일게 됩니다. 글을 읽으며 김구 선생님의 의롭고 맑은 정신을 보았기 때문이죠. 저는 김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
만세 운동은 하루 반짝하며 일어난 운동이 아닙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삼일 운동 이후 3개월 간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했고, 그 중 돌아가시거나 다치신 분은 23,470명, 체포당하신 분은 46,948명입니다. 전국 232개 부·군 가운데 218개 부·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만세 운동을 하게 되면 잡혀갈지를 뻔히 알고도 용기내어 나간 것입니다.
저는 기념관에서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이 1945년 2월경 동료 이정수로부터 선물 받은 태극기라고 합니다. 1946년 1월 다른 부대로 전출할 때 동료 대원들이 서명해 주었고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하야 피를 흘리라"
"삼균주의를 완성하자"
"필승"
"힘곳싸우주세요"
"삼천만 민족에 기둥이 되자"
"혁명의 투사가 되어라"
"국토의 방제(防提)가 되리라"
"애국"
"우리에 독립은 단결이다"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태극기에 서명하며, 결연한 의지를 몸소 실천한 분들 덕에 우리 나라가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게 됩니다. 저는 가끔 우리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당시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지점은 언제였는지도 찾아보게 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킬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부질 없는 생각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죽은 식구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과 같다는 걸 압니다. 그렇지만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 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살지어다.
-이준 열사의 말씀-
이준 열사의 존함은 중학교 때 국사를 배우며 접했습니다. 1907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의 생애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자신에게 있으니... 이 대목에서 문득 열사의 생애가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분이 당시의 굉장한 지식인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경도 국가고시 장원급제, 대한제국 최초의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독립협회 활동, 와세다대학 법학부 1년 만에 졸업, 신민회 활동 등 제가 잘 알지 못했던 그가 걸어온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성재판소 검사보 시절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일로 1년 만에 면직된 이력은 그의 출세욕보다 정의를 우선하는 성품을 느끼게 합니다.
근현대사기념관 입구로 올라가고, 다시 그곳에서 내려올 때 만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흉상입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여운형, 이준과 같은 인물들이 있고,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알려진 정도는 다를지라도, 모두 목숨을 걸고 대한 독립을 위해 혹독한 시대를 맞선 분들입니다.
역사 강사로 유명한 최태성 선생님이 어느 강연에서 들려준 일화가 떠오릅니다. 시험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지섭'을 선택지로 고르는 문제를 틀리자, 교실 뒤 쓰레기통으로 가서 시험지를 던지고 뒷문을 발로 차고 나가면서 "김지섭, 이 XX 뭐야?"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 개인의 문제인지, 우리 사회의 문제인지, 아니면 공교육의 문제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념관을 나와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거닐며 그들의 삶을 사색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 주변에는 산책로와 예쁜 카페들이 있습니다. 산책하며 건강도 챙기고, 걸으며 선열들의 삶도 생각해보며,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코스를 패키지로 모두 갖춘 근현대사기념관! 저는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