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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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복싱 그만둬야겠어. 길모어나 하그리브스 같은 선수는 앞으로 없을 거야. 전설의 복서들이 부활한다면 모를까. 이젠 정말 시시해졌어.”
“늙을수록 힘에 부치게 하는 선수가 많아질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힘들어?”
“생각이 좀 바뀌었어. 나이가 들어서까지 얻어맞긴 싫어. 사십 대부터는 몸 관리해야 할 나이잖아?”
어느 때부터 노화된 내가 두들겨 맞는 모습은 상상하기 싫었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을 안고 있다지만 나는 하그리브스를 이기고 내면의 모순을 키워갔다. 사탄은 나무껍질을 질겅질겅 씹은 듯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나도 그동안 즐거웠어. 그럼 복싱 그만두고 뭐할 거야?”
“그냥 뭐, 아버지 회사에서 일해야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자리였어.”
“그래? 그러면 자선 경기 한 번 열어서 회사 홍보하는 게 어때?”
“자선 경기?”
“그래, 경기 수익은 전액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자선 경기를 끝으로 은퇴 발표를 하면 네 이미지도 좋아질 거고. 연달아 회사 이미지 향상으로 이어질 게 뻔하지. 권투에 흥미를 잃었다면 이미지 챙겨서 돈이라도 제대로 벌어야 하지 않겠어?”
“오, 그거 괜찮은데!”“이젠 강함을 겨룬다는 생각보단, 이미지를 얻는다는 생각으로 아름답게 끝내자고.”
“또 시시한 경기를 치르는 데 시간을 쏟겠군. 이번에는 누구랑 붙어 볼까.”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면, 무명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게 어때? 영화에서도 아폴로 크리드가 무명 선수 록키에게 기회를 주잖아. 그리고 상대방은 네 신념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고르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내 신념이?”
“응, 네 신념!”
“그렇군! ㅎㅎ. 알았어. 어쨌든 이번 경기는 훈련할 필요도 없겠어.”
사탄은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길모어는 내 기준에 반전 평화운동과 환경운동과 같은 진보 운동가이자, 모두가 잘살자는 구호에 취한 이상주의자였다. 부자가 얻은 질서를 빈자에게 재분재를 하자는 불합리, 당장 시급하지 않은 환경문제 때문에 개발을 가로막는 사회의 좀, 이 모든 상(像)으로부터 비롯된 분노가 쌓여 그를 칠 때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같은 미국 국민으로서, 미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그를 장애물 걷어내듯이 옆길로 밀쳐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깔려 있었다.
하그리브스는 나처럼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 복싱의 세계로 발을 들인 특이한 선수 중 하나다. 하지만 내 경우와 달리 그는 선량하고 도덕적인 학자였다. 과학은 윤리학을 토대로 발전해야 한다는 그는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할만한 실험에 제동을 거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나는 Bank of BIoTecH라는회사의 주식을 대량 구매했다. 그 회사의 유전자 실험을 비윤리적이라 비판하여 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킨,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그의 선량함과 도덕성 덕분에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손실은 상당했다. 물론 손실만큼 돈이 들어오는 화수분이 있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좋아. 이번엔 러시아인 선수로 정했어.”
“러시아? 이봐,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는 권투 선수가 아니야.”
“효도르랑 붙겠다는 게 아니야. 러시아인 중에서 무명 선수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마지막은 가장 잔인하게 끝내주겠어.”
“기대되는걸?”
찰스에게 러시아인 선수 명단을 뽑아오라고 지시하고선 컴퓨터를 켰다. 내가 투자한 주식의 등락을 확인하고, 회사의 재정을 살폈다. 마르지 않는 우물, 퍼내어도 계속해서 차오르는 우물처럼, 주택담보대출의 이자와 파생금융상품의 목돈으로 돈은 쌓여갔다. 부동산은 하나의 불패 신화였다.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때는 저당 잡은 집을 팔아 이익을 남기면 될 것이라 여겼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격의 추세선을 따라 주택담보대출을 더욱 확대했다. 신용등급이 서브프라임(Sub Prime)에 해당하는 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