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하그리브스와의 시합 날이 다가왔다. 시합 직전 경기장은 이미 관중들의 술렁임과 언론의 주목으로 달궈졌다. 심판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나는 마주 섰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림과 동시에 관중들은 기대에 부풀어 환호성을 질렀다. 강자들의 싸움에 열광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모두의 오락거리였다. 이에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싸움 구경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침착한 아웃복서인 그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왼손 잽을 날렸다. 저돌적인 인파이터인 나 역시 거리를 유지하긴 마찬가지였다. 걸어 다니는 권투 교본이라 불리는 그에게 어떤 공격을 용납할지 몰랐다. 우리 둘 다 쉽사리 상대방에게 접근하지 않은 채 서로를 한동안 탐색했다.
심판은 지루한 관중의 야유에 응하듯 우리 둘을 불러 세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접근을 피하며 하그리브스의 공격에 적절한 위빙 동작만 보였다. 관중들의 야유가 계속해서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시작이자 마무리가 되는 라운드는 바로 다음 라운드라 생각했다. 첫 라운드에는 오로지 그의 눈만 응시할 뿐이었다.
먼저 자신의 기술을 펼친 건 그였다. 그의 공격은 내 기술을 파악하기 위한 미끼였다. 응수하지 않고 계속하여 두 눈만을 치켜세웠다. 그는 내 눈빛이 거슬렸던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적극적으로 돌진해왔다. 원 투 펀치를 휙휙 거리며, 그가 평소 자주 사용하던 기술의 조합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집요한 공격에 빈틈을 몇 번 내주었으나, 갑옷처럼 단단하고 탄력 있게 키운 몸을 부산하게 움직여 핵심을 비켜나가게 했다.
그런데도 하그리브스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비록 유효타를 얻지 못하더라도, 내가 근접하지 못하도록 적기에 미리 주먹을 내지르는 덫을 놓아 내 동작을 제어했다. 과연 쉽지 않은 경기가 진행되었다. 2라운드부터 나 역시 본격적으로 돌진했다. 공중 곡예사처럼 몸을 이리저리 유연하게 흔들며 재빠르게 하그리브스에게 접근하며 연타를 날렸다. 그의 완벽한 수비에 내 공격 역시 먹혀들지 않았다.
야성미를 드러낼수록 그는 신사적인 유연함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맹수처럼 할퀴며 달려드는 일방적인 모양새로 보였겠지만, 그의 아웃복싱은 차분하게 맹수의 힘을 빼놓았다. 결국 나는 상대방을 짓이겨놓겠다는 야성의 이를 드러내자마자 하그리브스의 스트레이트를 정확하게 맞았다. 순간적인 충격이 뇌에 짜릿한 전기적 신호로 전해져 무릎을 꿇게 했다.
사람들은 복싱계의 신사, 윌리엄 하그리브스를 연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왕을 끌어내리려는 공화주의자들의 함성처럼 두려움이 일었다. 다운 후 정신을 못 차려 수세에 몰린 쪽은 나였다. 레프트와 라이트의 훅이 쏟아지다 복부 옆으로 정확하게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마우스피스는 날아가며 구토를 일으켰다. 리버 블로우로 또 한 번의 다운을 허용했다. 가까스로 일어나자마자 또 한 번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꽂히려는 순간, 공이 울리며 나를 살렸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찰스의 목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복부를 강타한 묵직한 그 위력이 아직도 도장으로 찍혀 흔적을 남겼다. 과학자이면서 철학자인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저서를 번역한 학자답게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명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깔끔하고 합리적인 동작만 취하면서 실리를 다져간 것이다. 이토록 고전한 적은 오랜만이었다. 질 수도 있겠다는 긴장감이 또다시 이기고 싶다는 내적 에너지를 펌프질했다.
“괜찮아. 어려울수록 에너지가 생기거든.”
공은 고요한 전장의 적요함을 뚫고 포효하는 포성처럼 울렸다. 이번 라운드에 끝낸다는 일념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스텝이 빨라질수록 내 스텝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건 지금까지 보여준 바와 다를 바 없는 내 경기 운영 의한 방식일 뿐이었다. 사면에서 나를 심적으로 누르는 거울이 모든 선수의 속도가 느려 보이게 만들었다. 하그리브스도 내 속도쯤은 이미 예상했던지 스텝을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며 치고받았다. 서로의 얼굴에 정타가 들어왔다.
격렬, 격노, 격정이 이번 시합의 관건이라고 사탄은 말했다. 지금껏 끌어올린 속도만으로는 그를 쓰러뜨릴 수 없으며, 그의 신사적인 인성을 이용하는 비신사적인 전략을 경기의 향신료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속도는 내가 약간 앞섰으나, 군더더기 없는 수비의 견고함에 막혀 쉽게 그를 뚫을 수 없었다. 사탄의 전략이 모락모락 머릿속으로 피어올랐다.
일부러 복부의 허를 내주었다. 빈틈을 발견한 그는 조건반사처럼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주춤거리며 미끄러지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위험한 도박에 몸을 맡겼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는 주춤거리며 주먹을 거두었다. 요행으로 미끄러진 상대는 가격할 수 없다는 그의 올곧은 신념이 빈 곳을 공략하는 조건반사와는 이질적인 본능으로 모든 동작을 정지시켰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망설임 없이 탄력적으로 몸을 튕겨내어 그의 콧잔등을 절구통의 깐 마늘 찧듯 눌러버렸다. 때릴수록 무자비하게 되돌아오는 유리 샌드백을 깨부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