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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Mar 02. 2024

종이 거울(6)

6편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러시아는 여러모로 낯선 곳이었다. 입국 절차를 끝내고 공항 밖으로 나가자 택시 기사가 따라붙었다. 시내로 가려는 외국인을 많이 상대해 봤는지 택시 기사는 친절히 짐을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찰스는 택시 기사와 몸동작을 섞어 가며 가격을 합의했다. 바가지를 쓰지 않으려는 찰스에게 그만하고 기사가 제시한 가격에 따르자고 했다. 푼돈에 실랑이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무리는 내 조국, 미국과 한때 맞설 수 있었던 나라로 택하고 싶었다. 그들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했고,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남았다. 결국 우리가 옳았다는 걸 결과가 말해주었다. 빨리 짐을 풀어놓고 모스크바의 한복판으로 가 내 상대를 만나고 싶었고, 한때 세계를 양분했던 국가의 처참한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내가 찾은 복서는 ‘붉은 광장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짐을 풀어놓고 찰스와 서둘러 붉은 광장으로 갔다.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는 중이라 들었다. 빈부 격차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듯 보였다. 아름다운 석양 속에 잠겨, 광장 한가운데서 홀로 체력단련을 하는 젊은 친구가 보였다. 붉은 광장의 마지막 자존심, 바실리 차다예프였다.

    현지에서 구한 통역은 누더기처럼 해진 옷을 걸친 차다예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차다예프는 팔굽혀펴기를 하다 말고 일어났다. 함께 차 한잔하며 이야기하길 원한다고 전했다. 그는 흔쾌히 웃으며 짐을 챙겼다. 후식까지 사줘야 한다며, 커피와 나폴레옹 케이크가 맛있다는 카페로 입맛을 다시며 안내했다.

    “이봐, 젊은 친구. 나랑 자선 경기 한 번 하지 않겠나?”

    “보다시피,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남을 도울 여력이 있겠어?”

    “자선 경기의 수익은 전액 불우이웃을 위해 쓰려고 하네만, 그와는 별개로 시합을 수락하면 내 사비로 대전료 10만 달러를 주지. 어때?”

    “왜 하필 나 같은 무명 복서랑 붙으려고 하는 거지?”

    가진 건 없지만, 얼굴에는 당당함이 묻어났고, 말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유와 예의, 그리고 선함의 영역에 있는 모든 미덕은 능력이 뛰어난, 가진 자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가 선을 넘는 것을 더는 관대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분수를 모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미 내 영상은 봤을 테고,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날 이기지 못해. 마치 나랑 같은 급으로 맞설 수 있다는 당당함이 굉장히 불쾌하군. 왜 너랑 경기하려 하냐고? 한때 우리에게 까불다가 병든 곰처럼 벌렁 누워 자빠진 당신 나라의 민낯을 스포츠로 드러내려고 해.”

    내 진심이 담긴 발언이 여과 없이 통역을 통해 그에게 또박또박 전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강한 건 인정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움직임엔 소름이 돋았지. 좋아, 그럼 난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권투로 반증해야겠군. 러시아는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야. 자본주의가 만든 세계 질서에도 다시 일어설 저력이 있지. 우린 대조국전쟁 때 스탈린그라드와 레닌그라드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전혀 굴하지 않았어. 시합은 수락할게. 다만 조건이 있어.”

    “뭐지?”

    “난 보통 하루에 2,500루블 정도를 벌어. 보다시피 붉은 광장 근처를 전전하는 거지라 벌이가 규칙적이지도 않아. 그런데 당신과 붙으려면 훈련에만 집중해야 할 것 같아. 그럴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좋아. 우선 5만 달러를 주지. 그리고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기가 되지 않도록, 내 훈련 방식을 적어 봤어. 너도 참고하면 좋을 거야.”

    나는 그동안 해왔던 훈련 방식을 빠뜨림 없이 공책에 적어 건네주었다. 그는 대강 훑어보더니 경의를 표했다.

    “오호, 거울을 통한 훈련이라. 거울로 샌드백을 만들어? 참신한 훈련 방식이네. 그런데 왜 이런 비밀을 내게 알려주지?”

    “네가 알아봤자 일방적인 구타만 펼쳐지겠지. 시시한 경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할까? 난 자선 경기라고 봐주지 않아.”

    경기는 여섯 달 뒤에 펼쳐질 예정이었다. 여섯 달 동안 거울의 방에서 회사의 자산을 불릴 궁리만 했다. 많은 양의 주택저당증권(MBS)을 팔아서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는 일이 회사를 살찌우는 지름길이란 확신이 들었다. 사탄은 거울 속에서 나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전혀 따분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돈은 풍요의 땅을 돌고 돌았다. 시간은 돈의 유동성처럼 빠르게 흘렀다. 여섯 달 뒤, 차다예프와의 자선 경기 날이 다가왔다. 시합 하루 전날, 여러 언론사가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골드핑거 씨, 자선 경기의 수익 전액을 불우이웃에 기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중대 발표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이번 자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겁니다. 아버지를 이어 회사를 경영해보려 합니다. 제 목표는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입니다.” 

    기자회견장 내는 술렁였다. 역사상 가장 강한 라이트급 선수를 경기장에서 다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자선 경기라도 평소처럼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붓겠습니다.”

    아쉬움이 이번에는 환호성으로 바뀌어 터져 나왔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 시간에 업로드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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