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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Mar 09. 2024

종이 거울(7)

7편

    라스베이거스의 전통적인 복싱 경기장, 만석의 관중들은 단지 인류 최강의 복서를 본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명예로운 레드카펫이 경기장으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레드카펫의 색은 지금까지 밟고 올라간 선수들의 혈흔이 얼룩진 길이었다. 상대방의 피에 익숙해져야 더 높은 곳으로 간다는 신념으로 한 걸음씩 발을 뗐다. 차다예프가 경기장에 서 있었다.

    심판의 설명을 듣고 서로의 글러브가 주먹인사를 했다. 시건방진 녀석의 당당함을 1라운드에 잠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지는 거지답게, 라는 슬로건이 마음에 맴돌며 그가 여유를 부리는 걸 멈추기 위해 빠른 속도로 공격했다. 현란한 스텝을 밟자 사람들은 더욱 내 이름은 연호했다.

    ‘어! 이게 아닌데.’

    ‘뭐야 왜 이렇게 빨라!’

    ‘쳇, 어디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보자.’

    ‘으윽!’

    ‘뭐야, 여긴 어디야. 왜 내가 여기 누워있지?’

    삼십 초도 채 안 된 순간, 나는 따사로운 조명을 받으며 경기장 한가운데 벌렁 누워있었다. 상대를 얕보고 깊숙이 들어가다 차다예프의 펀치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나 경기를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심판은 괜찮냐는 표정으로 내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짜증이 섞인 채로 경기의 재개를 재우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관중들은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지만, 승패 기록이 없는 자선 경기라 챔피언이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했거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의 눈을 응시했다. 한 줌의 재를 털 듯이 가볍게 날려버리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얄밉게도 내 펀치는 번번이 핵심을 빗나갔다. 차다예프는 내 속도만큼 빠르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주먹을 지르면 그는 뒤로 빠졌다가 용수철처럼 다시 앞으로 튕겨 왔다. 내 공격은 그대로 복사되어 나에게 칼을 겨눈 뒤 돌아왔다. 틈을 노려 밀어붙이기가 무섭게 탄력적으로 반사되는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광경이 펼쳐졌다. 그게 뭔지 잠시 생각하다가 훅을 맞았다. 상실한 집중력을 상체와 하체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 했다. 망각하고 있던, 그 광경이 떠오르자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짐과 동시에 공포감으로 채워졌다.

    그의 가벼운 훅이 모기가 앵앵거리듯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성가신 모기를 손으로 치워버리려는 동작으로 옆구리 쪽 빈틈을 내어 주었다. 보기 좋게 리버블로우가 꽂혔다. 말랑말랑하고 단련해봤자 부질없는 부위에 묵직한 펀치가 연이어 투하되었다. 갑옷 같은 근육도 별 소용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위로 들렸을 때 어퍼컷이 내 턱을 강타했다. 경기는 2분 12초 만에 끝났다. 들것에 몸을 맡겨 링 밖으로 빠져나갔다. 들것에 실리기 전 안간힘을 써서 상대방을 보려 했지만, 실눈에 가려져 흐릿흐릿한 상만을 볼 수 있었다. 전체를 명확히 본 것도 아닌데, 그 실루엣은 왠지 낯이 익었다.

    챔피언에 대한 존경과 경의, 팬으로서의 충성심은 응고된 기름이 미열에도 쉽게 융해되듯 허망하게 녹아내렸다. 나에 대한 야유가 쏟아졌다. 단 2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며 투덜대는 그들의 시선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괜찮아?”

    차다예프의 병문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책에 적힌 대로 훈련했나?”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준비해서 나의 아성을 무너뜨렸는지를. 

    “음,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당연하지.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해줘.”

    “물론, 당신이 해왔던 방식대로 했어. 다만 가장 강한 적은 거울 속의 자신이라고 적어 놨지만, 난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았어.”

    “그럼?”

    “거울 속에서 꿈틀거리는 건 바로 당신이라 생각했지. 설령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따라잡을 수 없을지라도, 괴물 같은 당신보단 못해. 그리고… 아주 섬뜩했어. 거울 뒤에 굉장한 비밀이 있더군. 앞으로는 당신이 밟아온 길을 그대로 걷겠어. 경기 도중 당신의 모습을 내게서 찾지 못했나? ㅎㅎㅎ.

    그의 간사함이 묻어있는 웃음이 멎자, 요란하게 문이 열리며 찰스가 들어왔다. 땀을 뻘뻘 흘리는 그의 모습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할 수가 있었다. 

    “도련님! 큰일 났어요. 잘만 버티던 집값이 폭삭 내려앉았어요! 빌려준 돈은 어떻게 돌려받죠? 이대로면 파산입니다. 그리고 또….”

    “또, 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울의 방에 있던 모든 거울이 다 깨졌어요.”


[강원문학 제54집(2022)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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