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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Mar 24. 2024

연립방정식(2)

2편

    악질의 병장들은 간혹 500원을 주며 1.5L들이 이온 음료수 네 병을 사 오라고 시켰다. 돈이 모자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마음의 편지’와 같은 소원 수리는 간부에게 전해지기 전 선임병들의 사전 검열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언론의 차단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스템을 후임들이 뚫어 외부세계에 알리기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간다는 성경의 구절만큼 실현되기 힘든 이야기에 불과했다. 일병들은 말 그대로 ‘일(work)’병이었다. 일병이란 계급, 그것은 조직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온 비인격체였다.

    “전체 차렷! 당직사관께 경례!”

    “조심해서 공차고, 다치지 마라. 일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이상.”

    텔레비전을 보다 나온 당직사관이,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병장들은 운동장에서 인사이드 패스를 주고받으며 몸을 풀고 있었고, 상병들은 실력에 따라 균형을 맞춰 팀을 두 편으로 갈랐다. 축구를 할 때마다 머리를 짜내어 한 편의 진지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으나, 매번 지난 경기의 팀이 오늘의 팀으로 편성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일병은 일병답게 일(work)만 해야 했다. 눈부신 실적을 남긴다는 건 또 다른 일과 욕더미를 떠안는 것이었다. 모든 일병들은 그저 빗장 앞에 진을 치고 공을 막기만 할 뿐이었다. 축구가 일(work)이 되는 마술이, 마술사의 부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마술인지 마법인지 모를 환상을 생각할 틈도 없이 박상진 병장이 세차게 공을 몰고 우리 팀 문전까지 왔다. 박 병장 특유의 ‘맞고 뒈져라 슛’이 나오려고 용틀임을 했다. 겉으로는 ‘제라드 대포알 슛’이라고 전 병사들에게 칭송되는 슛이었지만, 속으로는 전역하면 두고 보자는 마음이 일게 하는 슛이었다.

    박 병장의 오른발이 노 젓듯 힘차게 뒤로 치켜 들렸다. 사력을 다하여 막는 순간 구성진 가락으로 박 병장의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일은 쉽게 예측 가능했다. 욕을 피하고자 길을 터준다면 패전의 책임을 뼈저리게 짊어져야 했다. 그에 따라 취침 시간도 보장되지 않는다. 일의 경중을 어디에 둘지 고민하다가 결국 태클을 했다. 그의 공이 내 발에 막히자, 예상했던 독기 품은 썩은 말이 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이 자식이!”

    메아리처럼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 축구의 묘미는 아슬아슬함이었다. 병장들이 공을 몰고 이리저리 드리블해 올 때, 최선을 다해 막는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실력이 모자라 빼앗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어야 했다. 똥과 된장의 경계, 카레 맛 똥과 똥 맛 카레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나는 죽도록 축구가 싫었다.

    우리 팀은 패했다. 우리 팀과 상대 팀 선임병들에게 동시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이끌려 했으나 결국엔 실패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날 밤 소등된 생활관에서, 풀숲을 헤치고 나온 뱀의 머리처럼 한 줄기 손전등 빛이 튀어나와 일병과 이병의 덮인 눈꺼풀을 열리게 했다.

    “이놈들, 병영체험캠프 왔지? 대답해봐 이것들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미쳤어? 크게 대답하면 죽는다. 선임들이 갈군다고 당직사관한테 알리는 거야?”

    “죄송합니다.”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야만 하는 나날들이 누적되어 커짐에 따라 무르고 무른 토마토 껍질과도 같은 마음 한구석이 폭삭 익힌 소고기만큼 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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