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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Apr 14. 2024

연립방정식(4)

4편

    이대범은 별 말없이 물러갔다. 터미네이터란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비록 공공의 증오대상인 박상진의 수하임에도, 그와는 분리되어 됨됨이를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힘을 느끼게 하는 그의 매력에, 몇몇 후임들은 매료되어 저절로 충성을 바치기도 했다.

    “식겁하는 줄 알았네. 정말 고맙다.”

    “그래, 우리가 맞후임은 잘 만났다니까, 정말.”

    안도의 한숨에 연이어 정현수가 칭찬을 거들었다. 최승우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 일병님, 이 일병님. 축구를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한동안 정현수와 나는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나는 최승우 특유의 진지함에 자조 섞인 목소리로 대거리를 했다.

    “그런 건 없어. 네가 박상진 턱주가리 한 방 날리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야.”

    아무리 그가 명석하더라도 하루 중 종교의식보다 더욱 철저하게 지켜지는 강제 축구로부터 몸을 뺄 수 있게 만들 묘안은 제시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강제 축구는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으로 전 장병에게 참석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오세민 병장님이 그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오세민 병장님?”

    “네, 오세민 병장님은 내무실 서열 3위이지 않습니까.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병장들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서열 1위입니다. 이제 막 병장을 단 박상진이 실세라면 실세일 수 있지만, 위아래의 위계질서를 쉽게 깰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군대의 보수성은 특정 인물 한 사람이 깨려고 해도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세민 병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면 해결된 셈입니다.”

    “어떻게? 오세민 병장님과는 일면식도 없어. 게다가 항상 과묵하게 책만 읽잖아.”

    “네,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겁니다. 오세민 병장님의 대학 전공이 문예창작학과입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경직된 군대 문화 속에서도 틈틈이 창작의 고통과 싸우는 문학인입니다. 따라서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말을 트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이 어느 정도 통하면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넌지시 던져보십시오.”

    “난, 됐네. 학창 시절을 축구로만 보낸 사람이라 글재주는 없어.”

    정현수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휴, 소설이라니, 죽을래? 게다가 언제 오세민 병장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나. 또 있더라도, 오세민 병장님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라고 알려진 거 몰라? 축구는 안 빼줄 걸?” 현수의 뒤를 이어 나 역시 손사래를 쳤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주 불침번, 이 일병님과 오 병장님이 함께 서도록 편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달에 오 병장님과 불침번을 함께 서면서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말수는 적지만 본인의 관심 분야에선 말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 승권이, 팔자에도 없는 소설가가 되게 생겼네. 차라리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고 해라.” 정현수는 날카로운 어조로 최승우를 타박했다.

    “너무 면박 주지 마. 이게 다 충심에서 우러나는 소리잖아.”

    밤 열 시. 취침 시간을 알리는 구슬픈 나팔 소리에 말똥말똥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의 흐릿한 윤곽만 치뜬 눈 속으로 들어왔다. 데카르트는 병상에 누워 천장을 보며 좌표평면을 떠올렸지만, 내겐 천장이 끝 간 데 없이 아득한 군 생활로만 보일 뿐이었다. 최승우가 제시한 묘책을 곱씹어 보았다. 처음 씹을 때는 소태처럼 쓴맛이 좌뇌 전체를 마비시켰지만, 곱씹을수록 그것은 좌우뇌를 모두 휘감으며 차올랐다.

    ‘소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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