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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Apr 28. 2024

연립방정식(5)

5편

3. 아브락사스


    ‘박상진의 일당들은 후임들이 허드렛일하는 시간에 마르세유 턴, 크루이프턴과 같은 기술을 익혔다.’


    학자들은 길거리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방으로 붙여 놓고 백성들에게 풀게 했다. 까막눈인 백성들은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감탄을 자아내고 무지함을 일깨워, 학자들이 지배하는 방식을 사상적으로 정당화했다.


 - 이승권의 첫 소설 「피터 고레스」 中


    “승권아, 컵라면 하나만 먹자.”

    “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라면은…?”

    순찰 코스를 돌고 속이 출출해졌던 차에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오세민 병장은 위병소 구석에 있는 감자 상자를 손짓했다. 새벽의 찬 공기가 컵라면의 맛을 더욱 증폭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오세민 병장과 나는 말없이 면발을 후루룩거렸다. 적당한 탄수화물과 나트륨이 주는 만족감, 인공적인 라면수프의 칼칼한 감칠맛이 한데 어우러져 시장기를 물러가게 만들었다. 새벽녘이 선사하는 고요함에 배부른 안락함이 더해져 사르르 졸렸다. 졸음은 부드러운 머랭 쿠키처럼 달콤하지만 가혹한 내일을 낳는 악마의 시(詩)라고 배웠다.

    “야, 졸리냐?”

    “죄송합니다!”

    “일병 때는 잡생각 없이 일에 몰두해라. 그래야 시간이 빨리 간다. 난 책 좀 읽을 거니까 전화 잘 받고 정문에 누가 오는지 잘 지켜봐라.”

    암흑 스크린, 즉 나의 군 생활과도 같은 정문을 뚫어지게 보았다. 칠흑에 둘러싸여 희미한 실루엣만 드러내는 정문은 예상대로 지루했다. 으레 선임과 후임이 함께 일할 경우, 힘든 부분은 후임의 몫이었다. 오세민 병장은 독서에 몰입 중이었다. 책의 제목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반가웠다. 오 병장은 거북처럼 목을 내밀어 문장을 곱씹었다.

    “밤새 읽고 나니 결말이 무섭고 슬프기도 해서,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일병은 공적인 업무를 제외하고 오직 선임병들이 먼저 묻는 말에만 대답할 수 있다는 악습으로 점철된 규정을 무심결에 어겼다. 내가 안고 갈 위험부담이 너무나 큼에도 대담하게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1984」와의 첫 만남이 의무적이고 가벼웠지만, 그 책이 주는 메시지는 전혀 가볍지 않았고, 지금의 상황과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오 병장은 읽던 부분을 책갈피로 표시해두고선 의뭉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읽어 봤냐?”

    “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숙제로 읽었습니다. 결말이 너무나 어두워 회색빛 도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회색이라, 그럴싸하군. 통제 사회가 보여주는 억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이지. 그러면 빅 브라더의 지배 방식을 어떻게 보고 있나?”

    “무결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항의 불씨를 짓누르는 치밀함보다 의식을 변화시킨 후 형벌을 집행하는 부분이 가장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통치 방식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 없을 거야. 그나저나 문학에 관심이 많나?”

    “네, 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되고 싶었다는 건 또 뭐야.”“좋은 작품을 읽을수록 제가 갈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능력 부족을 일찍 깨달으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 전공은 남들이 어려워하는 수학인데, 차라리 수학이 더 쉽게 느껴집니다.”

    오세민 병장은 수학이란 말에 솔깃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가벼운 웃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천천히 속으로 어떤 말을 되뇌어 여물게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수학자들이 소설을 쓴다면 생각지도 못한 작품을 낼 수 있을 거다. 짬짬이 글 좀 써봐. 나도 궁금하다.”

    어느새 먼동이 트려는지 날이 점점 밝아왔다. 서서히 어둠을 내몰아가는 빛이 위병소 창문을 뚫고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시어(詩語)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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