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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Jun 03. 2024

연립방정식(7)

7편

5. 데미안

     

    ‘제국의 간부로 편입되지 못한 졸병들은 이 체제가 누군가에 의해 하루빨리 무너지길 막연히 바랐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르쿠스라는 갈색 눈동자의 젊은이가 표류하다 섬에 도착했다. 황톳빛 피부에 검은 직모를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자신들을 구원할 사람이라 여겼다. 

    - 이승권의 첫 소설 「피터 고레스」 中


    “군대를 교묘하게 잘 표현하셨습니다. 이름도 잘 지으셨습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키루스 대왕을 생각하신 것 같은데, 왕의 권위와 위엄이 이름에 잘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승우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줄거리와 인물이 상징하는 바를 술술 해석해 나갔다. 종이는 부르르 떨리며 그의 손에서 날갯짓했다. 자우룩한 안개 속, 숨겨진 그의 감정이 존재감을 따갑게 뿜어댔다. 질투와 비루함, 환희를 숨긴 노회한 감정이 삽시간에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그냥 피타고라스가 갑자기 떠올라서, 아무 생각 없이 비슷한 이름으로 지은 거야. 고레스가 키루스 대왕인 것도 몰랐고. 우연히 뭔가 맞아떨어졌군.”

    “그렇습니까. 어찌 되었건 문장을 좀 더 다듬어 오세민 병장님께 보여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첫 글이 중요합니다. 싸움에서도 선방이 중요하다지 않습니까. 세헤라자데가 포악한 왕 앞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끝까지 엮어 나갈 수 있었던 건 첫 이야기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음, 솔직히 자신은 없는데.”

    “이 일병님, 내일의 희망과 정의감으로 조직된 글은 살인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이 글에는 마음을 울리는 진정성이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오세민 병장은 최승우의 예상대로 글에 매료되어 호평했다. 그러나 혹세무민에 관한 이야기는 물린 소재이기 때문에, 독자의 긴장감을 끝까지 견인하려면 다양한 갈등 요소를 넣고, 인물의 내 외면을 풍부하게 묘사해야 이야기가 느슨해지지 않을 것이란 조언을 덧붙였다.

    “일과 시간에 몸 쓰는 일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이 정도까지 용케 썼네. 글 쓰는데 내가 도와줄 것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말해봐.”

    “저기…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축구가….”

    넌지시 일과 후 강제 축구에 대하여 운을 뗐다. 오세민 병장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걱정 붙들고 글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축구를 빠져도 좋다는 결실을 본 희열의 순간이었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글의 진의가 선량한 병장의 마음속 활주로에 연착륙한 것만 같았다.

    오세민 병장에게 글을 선보인 이후로, 나는 축구에 참여하지 않고 부단히 글쓰기에 매진했다. 써본 적도 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종의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큰 뼈대는 최승우와 함께 만들어 갔다. 최승우는 투박한 문장을 보다 세련되게 고쳐주었으며, 역사적 고증에 따른 사실을 첨가할 부분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비록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있을 법한 역사적 진실을 가미한다면 더욱 맛과 향이 나는 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써야 할까?”

   “이승권 일병님, 피터 고레스와 미르쿠스의 갈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노를 더욱 증폭시키는 글, 가령 욕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박상진과 그의 일당은 피로감으로 예민한 상병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나를 겨냥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촉매 활동을 쉼 없이 벌이고 있었다. 굳이 공작질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재의 병영은 박상진이 쌓아 올린 절대권력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었지만, 박상진은 오세민을 쉽게 거역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락펴락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이 계급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위계질서에서 파생된 태생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정현수. 네 동기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냐?”

    “일병 정! 현! 수! 독서실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식은 군대가 무슨 소설가 등단시켜주는 학원인 줄 아나. 일병이면 일병 나부랭이답게 행동해야 할 것 아냐. 오세민 병장 말년휴가 나가면 죽여버릴 거야. 너도 동기 관리 잘해라.”

    박상진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쩌렁쩌렁 울렸다. 경고의 농도가 평소보다 짙었다. 정현수는 나의 군 생활을 걱정하여 운동장의 분위기와 장면을 낱낱이 내게 알렸다. 옆에서 정현수의 말을 듣던 최승우는 시름에 잠긴 나를 몰래 찾아왔다.

    “이승권 일병님, 정현수 일병님의 충고가 심각하게 들리셨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박상진은 웃자고 한 말 같았습니다. 축구는 잊으시고 독서실에 맘 편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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