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세진 Jun 09. 2024

연립방정식(8)

8편

6. 투쟁     


    ‘저항의 싹은 일신의 평안을 지키려는 마음과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 속에서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박상진의 너절한 횡포에 펜을 굴리는 형태로 소심한 반기를 들었다.’

    미르쿠스는 고통에 시달리는 섬사람들의 신음과 울분을 지나치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방인에게는 현지인의 두 배로 세금을 걷는다는 규정을 구실로 그는 모두가 보란 듯이 납세를 거부하였다.

    ‘박상진은 자신의 일당들과 함께 나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할 게 뻔했다. 지리멸렬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피터 고레스는 ‘최고 학자 회의’의 의제로 납세를 거부하는 한 이방인을 언급했다. 열두 학자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라는 무서운 형벌을 내리기로 정했다. 형의 집행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체를 나무 기둥에 솥처럼 걸어두고 아래에 모닥불을 지핀 후, 사람의 몸에 ‘루트√’라는 특수한 용액을 붓는다. 용액은 아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반응하여 사람의 몸을 미칠 듯이 가렵게 만든다.

- 이승권의 첫 소설 「피터 고레스」 中     


    수송대 소속 장병들은 일과 시간 중 쉴새 없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서 체력을 소진했다. 도로 평탄화 작업으로 며칠간 연이어 삽자루를 들고 온종일 땅을 파야 했다. 그러나 글을 써야 한다는 강한 자성은 지친 몸을 이끌었다. 침구류에서 흘러나오는 자성의 강도는 두말할 것 없이 강했으나, 글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이 반작용으로 더욱 강하게 발동했다. 졸림과 독서실의 고요함이 주는 공포감, 홀로 있다는 불안감과의 싸움이 지속될수록 참신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른한 몸은 축 늘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 개불 같았고, 까무룩 까무룩 울고 있는 창밖 너머 새의 소리가 더욱 나른함의 농도를 짙게 했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일요일 오후 세 시. 이대범 상병이 일병 생활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활관 내 모든 장병은 메두사의 얼굴을 본 듯, 한결같이 얼어붙었다. 발을 쭉 뻗고 있던 이 일병, 이불에 묻혀 코를 골던 김 일병, 너나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한 주 동안 피곤했을 텐데 푹 쉬어라. 전달 사항만 빨리 말할게. 한 시간 뒤에 박상진 병장님께서 축구하고 싶으시단다. 혹시 빠지고 싶은 사람 있냐? 몸이 아프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은 솔직하게 말해라.”

    “일병 이! 승! 권!”

    생활관 내 모든 장병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달라진 후임들의 시선, 마지못해 웃는 그들의 미소, 휑뎅그렁한 생활관, 쏘아붙이는 눈빛을 쬐는 처진 어깨. 강제 축구를 거부하는 혼자만의 움직임. 그에 대한 자명한 보복보다 후임들의 싸늘한 태도가 더욱 두려웠다.

    “뭐냐?”

    “오세민 병장님의 지시로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음, 박상진 병장님께 말씀드려 놓겠다만 이해 못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알아둬라. 그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네가 짊어져야 하는 거고.”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닌 ‘네, 알겠습니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연출되었다. 점잖지만 뼈가 있는 지청구는 고요 속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이대범 상병이 주먹을 말아쥐며 물러갔다. 고립이 주는 어슴푸레한 절망감이 군 생활의 미래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긴장으로 눅눅하게 얼룩진 생활관을 환기하려고 최승우는 창을 활짝 열며 후임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고독한 가시밭길의 좌우를 살피며 의심의 눈으로 걷고 있을 때, 나의 장자방은 내 어깨에 단단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승권 일병님. 글은 계속 쓰여야만 합니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축구를 빠질 명분이 더는 없습니다. 작품 속 미르쿠스를 자신이라고 생각하시며, 일병이란 계급도 끝까지 불의에 저항하는 희망을 보여주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승권 일병님은 저희 계급의 자존심입니다.”

    어깨를 짓누른 그의 손은 결의에 찬 행동만이 해방의 길이란 걸 알려주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선동적이고 고조적인 레토릭이었다. 그는 소시민다운 동기에서 시작된 이 일을 뜨거운 가슴에 군불을 때는 투사의 길로 변모시켰고, 레토릭에 달아오른 나는 조용히 결의에 찬 펜을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