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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Jun 16. 2024

연립방정식(9)

마지막편

7. 세계     


    ‘짜증 나는 녀석!’

    미르쿠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양형을 듣자, 피터 고레스를 향하여 소인배라고 욕했다.     

- 이승권의 첫 소설 「피터 고레스」 中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이 글의 가닥을 잡기 시작할 때부터 새롭게 다가왔다. 항상 공책을 두는 관물함 속 수건 뒤편,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어야 할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달콤한 휴일, 공책도 장병들을 따라 사이버지식정보방으로 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휴대용 랜턴을 들고 관물함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휘적댔으나, 공책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목이 바싹 타올랐다. 초조했다. 독서실 책상 위에 두고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한 재생산과 소멸의 결정체가 아니던가. 혹시 모를 확률에 기대어 발걸음을 독서실로 옮기려 했다.

    ‘콰당탕탕!’

    이대범 상병이 생활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뒤따라 일병들과 이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자의 관물함 앞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몸속 부신이 폭발 행정을 반복하는 내연기관처럼 아드레날린을 뿜어댔다. 불길한 예측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박상진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왔다.

    “이 쥐 같은 놈, 오세민 병장 뒤에 숨어 있으니 좋지?”

    오세민 병장의 휴가였다. 거슬림에 대한 보복과 심판의 날이 자연스럽게 정해진 셈이다. 박상진은 돌려차기로 내 오른팔을 힘껏 찼다. 예상하지 못했던 짜고 농도 짙은 액체가 눈으로 찔끔 삐져나왔다. 내 몸은 관물함 아래로 순식간에 처박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곤두박질쳤다. 그악스럽게 일그러진 피터 고레스의 낯을 숭앙하듯 쳐다보며 얼얼한 팔을 감쌌다. 죄송하다는 말을 마지못해 내뱉으려 할 때, 노크 소리가 유유히 들렸다. 나의 자방, 최승우였다. 그와 나의 시선은 허공을 가르며 의미심장하게 교차했다.

    “박상진 병장님, 이승권 일병이 축구를 빠지면서 써왔던 소설입니다. 이승권 일병은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박상진 병장님을 깎아내리는 선동적인 글을 썼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소설입니다.”

    ‘이젠, 내 군 생활은 끝났구나….’

    박상진은 그동안 자신을 겨냥한 벽서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았다. 모든 것이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을 쓰는 시점부터 최승우가 보였던 부자연스러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잔인하게 다가와 불붙은 담배꽁초로 생살을 후벼파는듯한 느낌 그 자체였다.

    소설의 막바지는 피터 고레스의 몰락으로 끝맺음 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모든 걸 관두고 형벌의 구덩이 속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비참한 백성의 순응으로 마무리될 것을 직감했다. 작중 주인공의 담력과 여유를 찾기란, 염전에서 보리를 수확하는 것과 같았다. 허탈감에 젖은 백성의 얼굴로 눈앞의 피터 고레스를 바라보았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위에 설지는 박상진의 한 마디에 달렸다. 체는 극한의 가려움을 안겨준다. 가려움은 곧 소멸로 이어진다. 소멸의 성질은 망각을 포함한다. 따라서 소멸은 잔인하지 않다. 소멸은 모든 걸 시간의 흐름에 묻을 수 있다. 하지만 박상진은 체의 관용보다, 소멸 없는 무관용을 가혹하게 베풀 위인이었다. 중세 교황의 파문과 같은 선임 대우 금지 명령. 그것이 내려지면 명령이 해지될 때까지 후임으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받게 되고, 선임병들에게는 대롱대롱 매달린 샌드백으로 간주되어 넌더리가 날 때까지 갈굼을 먹게 된다. 병장으로 진급하더라도 후임들이 따르지 않을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흠….”

    모두의 시선은 한가운데 서서 한 글자씩 소설을 정독하는 박상진에게 쏠려있었다. 긴장감이 일병 생활관 전체를 휘감아 곳곳에 뱄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박상진은 소설을 읽으며 피식거리며 웃기도 했고, 갑자기 심각해졌다가도 돌이켜 엷은 웃음을 보였다. 소설의 막바지에서 박상진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입맛에 따라 현실과 다르게 내용을 조직할 수 있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며, 박상진은 들고 있던 공책을 나름대로 공손히 건넸다.

    “끝이 안 났잖아. 눈치 보지 말고, 이번 달 안으로 마무리 지어서 나한테 가져와. 축구는 안 해도 좋다.”

    박상진은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설의 결말을 재촉하고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찬 생활관을 나가려 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얼빠진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대답했다.

    “저기! 박상진 병장님!”

    최승우가 나가려는 박상진을 황급히 불렀다.

    “뭐?”

    “그냥 가십니까? 전에 말씀드린 건….”

    “아, 그거? 까먹을 뻔했네. 지금 선포해야지.”

    반골의 증거로 소설을 넘긴 최승우는 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극상의 준비 과정은 이성적이고 치밀함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하극상 자체는 얻을 것이 별로 없는 비이성적 선택이었다. 후들후들 떨고 있는 내 몸뚱이를 밟아 한 계단 그의 입지와 서열이 상승하더라도, 나와 함께 협력하여 훗날을 그려나가는 것에 비해 그가 얻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한 글자씩 정성스레 곱씹어 쓰다가 몇 번이고 토악질해대며 박아댄 박제된 문장이, 믿었던 후임의 배신으로 박상진에게 넘어간 진실이 시린 반흔을 남겼다.

    “승권아. 후임 관리 잘해라. 이 녀석이 너 몰아내고 으뜸병사 도우미 자리를 달라며 협상하더라. 모두 잘 들어. 배신자 최승우는 오늘부터 내가 지시할 때까지 선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이상.”

    “박상진 병장님! 말씀이 다르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글쎄… 네 표현대로 내일의 희망과 정의로 조직된 글은 살인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최승우는 희멀건 생활관의 조명 아래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맞춰 문틈 새로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박상진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작 그것 때문이었냐… 왜 그랬냐?”

    나는 박상진이 나간 빈자리에 서서 최승우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의 자방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차분함을 머금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와서 뭘 더 변명하겠습니까. 흔한 소재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이승권 일병님의 필력에 질투가 많이 났습니다. 하루하루 이 일병님의 글을 다듬고 고칠 때마다 놀람과 시기, 질투에 휩싸였습니다. 저, 실은 신춘문예에 네 차례나 낙방했습니다. 그러다가… 열심히 했지만 아무런 결실도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뒤늦게 군대에….”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무릎을 꿇었다. 낙방의 괴로움으로 얼룩진 세월 뒤에 다가온 힘든 병영 생활은 배신을 도의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지만, 이십 대 중반의 설익은 그가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투복 무르팍에 묻은 먼지가 유난히 서글퍼 보였다.



    <K방송사 인터뷰>

    - 아나운서: 작가님과 제가 선·후임으로 인연이 닿은 곳이 군대이지 않습니까.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 이 작가: 연립방정식의 해는 하나의 식만으로 구할 수 없습니다. 같은 미지수를 포함한 또 다른 식이 필요하죠.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몰라 머뭇거리던 군 시절, 간단명료한 식으로 다가온 데미안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되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희망과 정의로 조직된 글은 살인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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