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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May 26. 2024

연립방정식(6)

6편

4. 싱클레어


    ‘후임들은 그의 제국을 아니꼽게 생각했고, 불만의 씨앗을 마음속 깊숙이 키우고 있었다. 어떤 이병이 박상진의 행동 시정을 요구하는 마음의 편지를 익명으로 제출했다. 부조리를 알리려고 용기 낸 이병은 모든 장병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쳐야 했다.’

    세금을 줄여달라고 항의하거나,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달라는 자는 피터 고레스가 심심풀이로 설계한 이중나선형 미로 속에 끌려갔다. 미로 곳곳에 굶주린 맹수들이 눈을 부릅뜨며 돌아다녔다. 바닥에 적힌 미지수 3개의 일차방정식 문제를 풀면, 맹수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백성들은 까막눈이었다.

    - 이승권의 첫 소설 「피터 고레스」 中     


    우리 중대에서는 한 계급씩 진급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수록 제약이 풀리는 관습이 내려져 왔다. 진급의 최종 단계인 병장이 되면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예를 들어 상병의 경우 BX와 목욕탕 입장이 자유로웠고, 샴푸, 클렌징폼과 같은 일부 사제품도 사용할 수 있었으나, 마스크팩과 선크림을 발라서는 안 되었다. 일병, 이병의 경우는 군에서 지급된 보급품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BX는 선임의 허락 없이 입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으뜸병사 도우미란 공식적인 직책에는 예외가 허용되었다. 으뜸병사를 보좌하며 각종 휴가를 받을 수 있었고, 모든 사제용품 사용이 허용되었으며, 배고픈 시절의 해방구인 BX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으뜸병사는 일 처리를 잘하는 한 사람을 도우미로 지명하여 자신의 옆에 두었다. 으뜸병사를 도와 잡다한 일을 처리하느라 평소 바쁜 편이었지만, 그 권한은 계급적 한계를 벗어난 말단 장병의 부러움을 사는 자리였다.

    “이승권 일병님, 이야기가 잘 풀리셨습니까?”

    “응, 덕분에. BX에서 한 보따리 사 왔으니 많이 먹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혹시 소설 써보신 적 있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묻냐? 솔직히 막막하지.”

    “제 전공이 국어국문학 아닙니까, 최선을 다해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정말? 네가 부담스러울까봐 일부러 도와달란 말 안 했거든. 역시 나의 장자방이야. 자방 형!”

    엄격한 상하 관계로 이루어진 조직 속에서 너무 기쁜 나머지 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의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나 더 많았다. 그는 늦게 입대한 셈이지만, 영특함과 뛰어난 상황 판단력으로 군 생활에 잘 적응했다. 다만 어떤 이유로, 무얼 하다가 입대가 늦어졌는지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어떤 내용이든 써보십시오. 처음 쓰신 부분을 토대로 이야기의 큰 줄기를 상의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걸리는 문제가 있단 말이지.”

    단체 생활에서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고통은 함께 견뎌 내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혼자만 살자고 일을 벌였다간 후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현재의 안락함을 추구하자고 미래의 크나큰 화근을 양산하는 결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승권 일병님께서는 평소 일을 잘하셔서 지금 으뜸병사 도우미로 계시지 않습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밑의 애들은 큰 불만을 품진 않을 것입니다. 고작해야 축구 하나 빠지는 것 아닙니까. 혹여나 그런 애들이 있다면 제가 철저히 관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승우 너만 믿는다.”

    다들 군 생활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피로감에 절어 곯아떨어지는 마당에 나 홀로 독서실 자리를 밝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스탠드 불빛이 컴컴한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빛났다. 법정 스님께서는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축구만 빠질 수 있다면 이깟 글쯤이야 맘 가는 데로 써보자는 이유 모를 용기가 생겼다.

    가장 먼저 박상진이 떠올랐다.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무의식은 의식에 따른 일상을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가상의 세계에서만이라도 박상진의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마음이 움텄다.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피터(Peter)… 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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