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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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어느 여름, 트레이너의 존재를 알게 된 날은 멋들어진 나무갓이 화창한 햇살을 담고 있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 볕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산더미처럼 불어난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고, 돈으로 즐거움을 얻는 효용은 더는 늘어날 수 없었다. 주식투자로 벌 만큼 벌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 왔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몸소 느끼던 시절이었다. 즐거움을 찾기 위해 다 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디로든 뛰어들더라도 돈이 해결해주리란 생각이 들어 마음의 병을 얻을 것만 같았다.
“이봐, 친구. 사는 게 재미없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방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 된 구역이었다. 더군다나 내게 반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가족뿐이 었다.
“맞나 보네. ㅎㅎㅎ.”
“누구야?”
“거울 속에 있지.”
홀로 벽에 덩그러니 달린 거울이 눈에 띄었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몰래 잠입한 좀도둑이겠거니 하며, 소파 아래 둔 연장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선 천천히 상대방이 숨을 만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럴 필요 없어. 절대로 볼 수 없거든.”
“누구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나? ㅎㅎㅎ. 여기 사람들은 ‘Satan(사탄)’이라고 부르던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눈을 여러 번 비볐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몸속에서 피어올라 털끝까지 번졌다. 형이상학적 존재는 상상의 산물일 뿐, 실재하는 건 아니라고 믿었던 터였다. 복부를 꾹 눌러 보고, 정신을 가다듬 었다.
“설마 정말 성경에 나오는 그… Satan(사탄)? 이렇게 세상을 활보하고 다녀도 되는 거야? 신이 용서했나?”
“욥기를 읽어보면 알 거야. 위대한 신도 내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걸. 어쨌든 내 덕에 신도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는 거 아냐.”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사탄의 곰살궂게 주절대는 말에 시나브로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왔어?”
“네가 심심해 보여서 왔지. 돈 버는 것도 지겹지? 이미 액수를 가늠할 수 없는 돈더미 속에서 천만 달러가 늘어나든, 일 달러가 늘어나든 다 똑같잖아?”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아주 재밌는 기회를 줄게. 복싱 한 번 해볼 생각 없어?”
거울 속의 사탄은 흥분했는지, 거울의 표면을 일렁이며 자신을 표면으로 드러낼 듯 말 듯 움직여 보였다. 최초의 여자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도한 혀가 내게도 날름거리며 시설스레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곳에서 운동선수 제의가 빈번히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금융 재벌의 아들이란 걸 알게 되자, 다들 실례했다며 부리나케 내뺐다. 결국 아버지의 회사를 경영하는 쪽으로 앞날의 가닥을 잡았고,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경영학과 경제학을 배웠다. 처음엔 회사를 굴리는 게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경영에서는 자본이 깡패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돈을 목표로 하는 활동은 많은 부를 갖고 태어난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내면의 허탈함을 사탄은 꿰뚫어 보았던 것일까. 링 위에서는 부자와 빈자가 동등하고, 부자 역시도 빈자로부터 카운터를 맞고 쓰러질 수 있다는 자릿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어퍼컷을 맞아 턱이 돌아가더라도 부자 아버지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냉혹한 링의 세계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제안을 고민 없이 수락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악마와의 계약이 맺어졌다.
“챔피언이 되도록 단련해 줄게. 어디까지나 네 노력에 달렸지만. 궁극적으로 너 자신을 이기는 걸 목표로 잡아야 할 거야.”
사탄의 지시대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머물던 별장을 훈련시설로 만들고, 바닥을 제외한 모든 면을 거울로 덮어버렸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무한히 복사된 나를 보며 혹독한 수련을 해야 했다.
“이봐, 왜 하필 날 선택한 거야?”
“내 영혼의 정수를 감당할 만큼 충분한 그릇이니까. 대범하고, 침착하고, 영리한 데다 악한 구석도 있지. ㅎㅎㅎ.”
※ 나세진 소설집 '춘천의 바람은 언제나 푸르길'의 첫 번째 소설, '종이 거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문학 작품 자체가 가지는 예술성과 흥미와 공감을 불러일으로킬 수 있는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상업적인 목적보다 출간 자체에 의미를 둔 소설집입니다. 물론 많이 팔리면 좋겠다는 마음은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제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질문을 드리는 글이 된다면, 주된 목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 문장씩 심사숙고하여 써 내려갔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발행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