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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Feb 16. 2024

종이 거울(1)

1편

* * *


    조 프레이저가 무하마드 알리를 쓰러뜨린 그 경기장의 조명은 새로운 신성을 맞이하는 폭죽처럼 환하게 빛났다. 2001년, 나는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라이 트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에서 길모어를 상대했다. 경기 내내 나를 괴롭혔 던 그의 군함조 같은 훅에 6라운드를 기점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다른 강력한 무기를 꺼내야겠지만, 그 어떤 숨겨둔 카드도 갖고 있지 않은 채 그는 속수무책으로 링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밑천이 떨어 져 조급함이 생겼는지, 스트레이트만 허공에서 요란하게 날아다녔다. 지루함 끝 에 내지른 결정적 펀치에 길모어는 턱을 내주었다. 머리 언저리를 배회하던 스트레이트가 그린 곡선이 바닥으로 흐물흐물 흘러내리며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요란하게 울렸다.

    복싱 선수로 데뷔를 하고 그와의 시합이 있기까지 자그마치 삼 년. 그동안 훈련으로 만들어진 고통의 순간들을 꾸역꾸역 밀도 있게 시간 속에 심어놓았다. 심판이 내 손을 번쩍 든 순간 세계인들은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에 환호했다. 데이비드 길모어, 전무후무한 천재성에 성실함까지 지닌 무패의 복서. 하나 그 녀석은 역겨운 반전 평화운동가이자, 케인스주의자이다. 그 외에도 환경운 동과 같은 진보적인 운동도 부지런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평소 그의 턱을 날리는 상상을 시도 때도 없이 해왔다. 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위계질서를 거부 하는 부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비대해지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구멍을 파서 다시 메우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거란 케인스의 말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 들을 위해 정부가 왜 빚을 만들어야 하는지 반감이 일었다. 나의 조국, 미국에서 벌어진 스태그플레이션 앞에 그의 이론도 무릎 꿇지 않았던가. 경쟁에서 밀린 자들을 부양하는 복지 정책은 결국 나 같은 부자인 사람들의 세금을 더욱 걷어 갔다. 특히나 미국의 의료보험을 확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권투나 열심히 하라는 말로 일축하고 싶었다.

    “도련님. 대단하십니다. 길모어를 꺾었어요! 이젠 골드핑거 도련님께서 세계 챔피언입니다! 언론에서는 떠들썩하게 이번 시합을 대서특필할 겁니다.”

    “7라운드부터 봐주는 티가 많이 났나?”

    “지금 도련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찰스는 호들갑을 떨었다. 언론의 대서특필이란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비서인 찰스의 눈에 내가 상대방을 봐주는 걸로 비쳤는지가 중요했다. 챔피언 타이틀전의 성사까지 일곱 번의 경기를 연달아 이겨야 했다.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지독하게 변덕스러운 트레이너 덕분에 모든 경기는 상대를 완롱하며, 여유롭게 운영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싫어하는 상대지만, 길모어에게 굴욕감만큼은 안겨 주기 싫었다.


    길모어를 꺾은 후로도 여전히 나는 패하지 않는 복서였다. 방어전을 치를 때 마다 관중들은 내가 패할 거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절대적인 위상을 오랫동안 누리면서, 복싱은 점차 지루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강자와 싸우며 돋아나는 긴장감,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살아있다’라는 저릿한 희열에 몸을 떨어 왔다. 그 떨림은 내가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란 신념에 기인한 것이었다. 타고난 자질과 근성도 갖추었지만, 여전히 노력으로 정점을 향해가는 인간일 뿐이란 믿음이 어느덧 시들해질 때가 온 것이다. 길모어처럼 6라운드 내내 나를 성가시게 할 천재는 앞으로 찾아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서글퍼졌다.

    어떤 이는 내가 돈의 힘으로 챔피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릴 늘어놓는다. 재력은 실력 향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재력으로도 수습할 수 없는 변수는 너무 많다. 또한 해가 갈수록 진행되는 노화는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절대 강(强)이란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주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챔피언이 된 지 4년이란 세월을 속수무책으로 맞으며 내 신체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오늘도 이기고 돌아온 거야?”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뭘 물어.”

    거울의 방. 방문이 열리자마자 사면이 유리로 갇힌 공간이 나를 선뜩하게 맞이했다. 오로지 나에게만 들리는 음성. 소름 돋도록 스산하고, 달콤하고, 매력적이면서 두려움을 심어주는 유혹의 소리. 이 소리의 주인인 트레이너 덕분에 나는 여태껏 챔피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ㅎㅎㅎ. 오늘도 시시했지?”

    “뭐, 그렇지. 길모어만큼 긴장하게 하는 선수는 없는 것 같아. 나이가 들면서 몸뚱이는 시들시들해져 가는데 말이야.”

    “건방진데? ㅎㅎㅎ.”

    “피곤해. 씻으러 갈 거야.”

    “오케이!”

    잠시뿐인 긴장으로 얼룩진 땀의 기억을 떠올리며, 길모어와의 결투를 욕조에서 시청했다.




※ 나세진 소설집 '춘천의 바람은 언제나 푸르길'의 첫 번째 소설, '종이 거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문학 작품 자체가 가지는 예술성과 흥미와 공감을 불러일으로킬 수 있는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상업적인 목적보다 출간 자체에 의미를 둔 소설집입니다. 물론 많이 팔리면 좋겠다는 마음은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제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질문을 드리는 글이 된다면, 주된 목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 문장씩 심사숙고하여 써 내려갔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발행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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