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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Feb 16. 2024

종이 거울(3)

3편

* * *

    2006년, 정부의 금융정책은 고금리 정책으로 돌아섰고, 그에 따라 주택담보대출금의 회수율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부동산 가격은 내려갈 줄 몰랐다. 지긋지긋한 훈련으로 땀이 온몸을 뒤덮었다. 찰스는 부동의 자세로 서서 내 고통스러운 얼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역할은 내 고통이 턱 아래까지 차올라 숨이 턱턱 막힐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통의 정점으로 나를 한 발짝 더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도련님, 좀 쉬었다 하시죠.”

    찰스가 마른 수건을 정성스레 내밀었다. 자분자분하고 충직한 비서였다. 등에서 모락모락 스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넓게 펴고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요즘 윌리엄 하그리브스가 무섭게 치고 올라옵니다. 영국 역사상 무결점의 복서로 주목받고 있죠.”

    “그래, 영상으로만 봐도 얼마나 강한지 느껴져. 다음 상대는 그가 되겠지. 지금껏 관두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도련님, 이길 것 같습니까?”

    “찰스, 주제넘게 내 생각을 물어보지 마. 자, 다시 일어나지.”

    흐트러진 바지춤을 정돈하며 일어났다. 하그리브스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극장에서 무대가 암전하는 순간의 칠흑이 나를 쏘아붙인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만 들리는 거울의 음성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거울 속 너를 계속 주시해. 실존하는 그 어떤 선수도 거울 속의 너를 이길 수 없어.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거울 속의 네 속도를 능가할 수 없거든. 완전무결한 이데아지.”

    거울 밖 실체가 거울 속의 허상을 이길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심장을 달아오르게 했다. 사탄은 계속하여 주절거렸다. 

    “하지만 빨라봤자 같은 속도라고 생각하면 정신의 감옥에 갇히는 꼴이 되는 거야. 네 속도가 일으키는 잔영이 거울 속의 너보다 더 빠르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 감옥을 깨부수고 나올 수 있어.”

    끊임없이 나의 이데아보다 빠른 주먹과 스텝, 더욱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려 노력했지만, 구토만이 뒤따라왔다. 그때마다 찰스는 저택에 상주하는 주치의에게 연락하며, 오물로 얼룩진 바닥을 닦는 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이봐, 사탄. 오늘 도전자가 정해졌어. 윌리엄 하그리브스. 예상한 일이야. 결과가 어떨 것 같아?”

    “너한테 달려 있지. 난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도록 개입하진 않아. 너희들에겐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자유의지를 신께서 보장해주라고 하셨거든. 왜 그런 걸 물어봐?”

    “그는 지금의 나보다 강한 것 같아. 느낌으로 알 수 있어. 잠재된 힘을 더 끌어내고 싶은데 매일 같은 훈련을 반복하니까 벽에 갇힌 느낌이 들어.”

    사탄은 잠시 생각하더니, 음흉한 미소와 함께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목욕탕 안의 희뿌연 김처럼 사방으로 퍼져 몸을 나른하게 했다.

    “이봐, 넌 너무 신사적이야.”

    “무슨 말이야?”

    “사람 때릴 때 처음엔 재밌었지? 더 때리며 농락하고 싶다가도 도전자가 턱없이 네 실력을 못 따라오면 타격하는 재미도 떨어지고, 측은한 마음도 드는 거야. 맙소사! 왜 신은 인간에게 이런 본성을 주셨을까. 그런 건 하등 필요 없는 마음이라 던져 버려야 해. 좀 더 악을 즐겨봐.”

    “악을 즐겨?”

    “그래, 길모어랑 가졌던 2001년의 시합을 생각해 봐. 7라운드부터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는데, 왜 애써 그러지 않았을까. 상대방을 어쭙잖게 존경하려는 거추장스러운 마음이 동한 거 아냐. 그런 걸 버려야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이봐, 난 악하기로 둘째라면 서럽다고.”

    “여전히 부잣집 도련님 티를 벗어나지 못하는군. 어릴 때부터 받았던 재벌 2세 교육이 하나같이 점잖은 커리큘럼이잖아. 고상한 스포츠와 격식 등. 그런 올무에 갇혀 내면의 악을 좀 더 끌어내지 못하는 거지. 지금부터 환경을 바꿔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봐.”

    사탄의 조언에 따라, 거울의 방 가운데 훈련용 샌드백 하나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게 되었다. 그것의 특이한 점은 샌드백이 거울로 둘러쳐 있다는 것이었다. 샌드백 거울의 겉면은 투과성이 좋으면서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복합소재로 겹겹이 둘러쌌다. 적당한 소재를 찾느라 애먹었지만, 역시나 돈이 해결해주었다. 복합소재 연구원에 회삿돈을 전폭적으로 쏟아부었다. 주택담보대출을 한데 모아 만든 파생금융상품을 팔아서 자금을 댈 수 있었다. 세계 10대 투자은행의 후계자가 될 나에게 미국이란 땅은 에덴동산 부럽지 않은 풍요의 땅이었다. 가만있어도 아버지의 회사 곳간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골드핑거, 인간의 강함은 순수한 악에서 올 때가 많아. 이 샌드백은 악한 근성을 폭발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지. 조만간 악이라는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 손실 없이 돌아가는 영구기관으로 체질 개선을 할 거야.”

    고정된 거울과는 달리 샌드백은 내 움직임과 위치를 흔들어 놓았다. 쭉쭉 뻗은 스트레이트에 움푹 들어간 부위는 형상기억합금처럼 원형을 회복하여 되레 나에게 스트레이트를 꽂으려 맹렬하게 돌진하려는 것 같았다. 샌드백에 비친 나에게 번번이 카운터를 맞았다. 단 한 방의 적중을 목표로 몸부림쳤으나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의 마지막 발악을 군화로 뭉개듯이, 사탄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공격해오는 거울 속의 자아를 이겨야만 하그리브스를 이길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이 분노로 치솟아 굳게 꼬인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버렸다. 울화에 치민 맨주먹은 피멍으로 부풀어 올라 샌드백 거울에 거미줄 같은 금을 자근자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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