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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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은 아침부터 밥상머리에 앉아 계약의 이행을 강조했다. 저녁쯤 피곤한 일이 벌어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옆 방의 두 여자를 겨냥한 똥침을 계획하고 있을 터였다.
“미안한데, 난 빼줘. 오락에 협조한댔지, 범죄에 협조한다는 건 아니야.”
“쳇, 그럼 나 혼자만이라도 하겠어. 불국사 가보고 싶댔지? 많이 가봤다면서 왜 또 가냐. 나는 절 근처도 가기 싫어.”
“그럼 넌 경주까지 와서 뭘 하고 싶은데?”
“음… 첨성대 안에 사람을 묶어 놓고 실컷 똥침 하기? 들키면 돈과 권력으로 해결하면 되고. 첨성대 갈 때 네가 운전 좀 해줘.”
“관둬.”
일반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다. 이런 놈이 어떻게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알고 보니, 신재율의 아버지가 학벌 취득을 위한 보장성 보험의 성격으로 일찌감치 그놈을 해외에 거주시킨 덕에, ‘해외거주자 전형’이라는 무시험전형으로 쉽게 학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 천둥벌거숭이는 일주문에 들어설 때부터 불국사 경내의 수려함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따분한 표정으로 주변의 관광객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친구! 보고 싶었던 것 혼자 천천히 둘러봐. 나는 관음전만 보고 나가서 놀고 있을게. 이따 저녁 때 봐.”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놈이 기습적으로 입을 열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원래부터 미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라 신경을 거두었다.
“관음전은 왜?”
“관음보살은 여자라며? 얼마나 예쁜지 좀 보게.”
여와의 조각상에 반하여 불경스러운 시를 벽에 쓴 상나라의 주왕이 떠올랐다. 녀석의 웃음에 부잡스러움이 묻어났다. 모기 같은 녀석을 뒤로하고 혼자 사찰을 돌아다녔다. 여러 전각과 문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관찰했다. 제석천의 지시로 동서남북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꼈다. 신재율의 훈육 조교로 적합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지나 관음전에 다다랐다. 천 개의 손이 어지럽게 만다라처럼 둘러쳐져 있는 관음의 모습은 삼라만상을 흡입하는 블랙홀처럼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게 했다. 눈을 감았다. 부디 금강역사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어리석은 중생 한 명의 죄를 호되게 물어달라 빌었다.
토함산 중턱에 햇살이 포복하듯 걸려 있을 무렵까지 혼자서 고향의 명소를 둘러보았다. 어릴 적의 고향보다 화려하게 변했지만, 과거의 친구들과 함께했던 장소들은 나를 피하려고 달음박질쳤는지 흔적도 없이 새 건물로 덮였다. 시름에 잠긴 채 이를 갈 때였다. 뜬금없는 휴대전화 진동 소리에 몸이 휘감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불안감이 너울처럼 사납게 밀려왔다.
“신재율이 친구 되냐?”
처음부터 내리꽂는 반말로 짐작건대, 불량스러움이 선명하게 묻어나는 인물이란 걸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누구시죠?”
“지금 말하는 장소로 혼자 와서 친구 놈만 조용히 데려가. 경찰에 신고하면 네 친구는 죽는 거야.”
경험은 능력을 살찌운다고 평소 생각했지만, 사람의 안위가 좌우되는 경험은 능력을 마비시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만 했다.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경찰은 사라진 사람이 모 정유회사 재벌 2세라는 말을 듣는다면 요술봉이 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지만, 한편으론 그놈의 신변이 확보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한 언론으로 새어 나간다면 일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란 판단이 섰다.